소설 속 주인공처럼

파리의 안나 103

by Anna

늦잠을 잤다. 분명 알람을 들었는데 꺼버리고 계속 잤다. 아침마다 초인종이 울리면 ‘제발 혈당이길’ 하고 바란다. 다행히 내가 정신을 차린 9시 30분 이후에 뚜왈렛이 왔다. 임무 수행을 마치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 너무 늦게 먹어서 조금 있다 먹을 점심이 맛이 없을 것 같아 걱정되었다.


오늘은 비가 안 왔지만 운동은 안 했다. 몸이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점심 먹을 때까지 쳐져 있다가 먹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은 무려 삼겹살이었다. 푸짐한 한상에 보답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먹었다. 마치 사육당하는 기분이었다. 식사는 즐거워야 하는데 매일 그냥 살기 위해 먹는 기분이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먹는 밥이 아직도 어색해서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늦장을 부리다 2시 30분 정도에 집을 나섰다.


아침에 애경 어머니께 문자를 받고, 내일모레 밤 따러 갈 때 필요한 준비물을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내내 책을 읽었다. 읽을수록 공감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책이니까 그렇겠지. 라데팡스에 도착해서 바로 오샹으로 들어갔다. 간식으로 가져갈 브라우니를 찜해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면장갑이나 목장갑이 필요했는데 안 보였다. 결국 고무장갑 저렴한 걸 발견해 하나 고르고 그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목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 아마 직원 중 누군가 벗어 둔 것 일거다.


저번에 찜해 둔 1유로짜리 공책과 사인펜을 사기 위해 필기구 쪽으로 갔는데 행사가 끝났나 보다. 프로모션이 싹 바뀌어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다행히 공책은 쓸 만한 걸 찾았는데 사인펜은 없었다. 고민하다 그냥 펜은 안 샀다. 앞으론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사야겠다.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계산을 하는데 직원이 “트화 디죄호”라고 말했다. 1유로 동전 하나와 2유로 동전 하나, 10성팀 하나를 내밀자 계산대를 보여줬다. 3.18유로였다. 아직 발음만으로 숫자를 알아듣는 건 무리인 것 같다. 급히 1성팀, 2성팀, 5성팀 각각 하나씩을 꺼내어 내밀었다. 벌써 4시 10분이었다. 집에 갈 때는 라데팡스 다음 역까지 걸어서 지하철을 타려고 했는데 늦어 버렸다.


그냥 라데팡스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서 할아버지께 카톡이 왔다. 이미 뚜왈렛이 다녀갔으니 천천히 오라는 말씀이셨다. ‘집 앞입니다...’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오늘은 한글날이라 파리에서 한글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결국 그 계획은 내 게으름으로 인해 포기하고, 오랜만에 퀵 보드를 타러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두통이 가시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앙발리드를 지나 알렉산더 3세 다리까지 갔다. 오르세까지 씽씽 달려 잠시 앉아서 많은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생각하게 된다. 여행 온 한국인이 많아서 조금 웃겼다. 혼자 온 사람도 꽤 있었다. 다 여자들이었다.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말았다. 다시 퀵 보드를 타고 콩코르드 광장 역으로 갔다.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괴로웠다. 파르퇴흐 역에 내려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대사관 파티로 외출 중이셨다. 언니와 단 둘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런 시간이 익숙해지는 내가 참 무섭다. 언니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고,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와 둘이 밥을 먹을 때보다는 훨씬 편하다. 밤까지 삶아 먹고 난 뒤 할머니의 이를 닦아드리고 방에 왔다. 이제 불어 공부를 하고 계획을 세울 거다. 배가 너무 나왔다. 내일 아침은 꼭 조깅을 해야지. 늦잠 자지 않을 거다. 게으름 피우지 않을 거다. 각성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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