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파리의 안나 97

by Anna

아침을 먹고 조깅을 하러 갔다. 엊그제보단 힘들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30분을 내리뛰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점심을 먹기 전 프랑스 존에 들어갔다가 ‘재불 한인 걷기 대회’ 관련 기사를 읽었다.


다음 달 1일 파리에서 재불 한인들을 대상으로 평화 통일이 주제인 걷기 대회가 열린 다는 소식이었다. 참가비는 무료였고, 출발지는 앙발리드였다.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참가 신청 메일을 작성하는데 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부르셨다. 삼계탕을 맛있게 먹고 방에 돌아와 참가 신청 메일을 마무리 지어 보냈다. 약 9KM를 걷는다고 하는데 그전에 조깅을 통해서 체력을 길러놔야겠다.


이후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보다가 2시쯤 할아버지와 유로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사실 금요일마다 유로 마트에 가시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해서 따라나섰지만 그리 유쾌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 마트에 도착하여 필요한 것들을 담아 계산을 하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을 거셨다.


매주 올 때마다 친한 척 말을 거시는데 처음엔 친절한 분이구나 싶었다가 나중엔 그 관심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졌다. 게다가 오늘은 코 밑에 난 내 뾰루지까지 언급하시더라. 짜증이 나서 일부러 눈을 안 마주치고 대답도 대충 했다.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냐, 공부를 잘하고 있냐, 도대체 본인이 무슨 상관인지 도움을 줄 것도 아니면서. 무거운 짐을 들고 집에 도착해서 조금 쉬다가 뚜왈렛 후 잠시 외출을 했다.


저번에 알렉스가 알려 준 생활용품점에 구경하러 갔다. ‘생 라자르’ 역 근처라는 것밖에 모르는데 기억을 되살려 찾아갔다. 가게의 이름은 ‘코사’였다. 실용적인 물건들부터 저렴한 물건들까지 다양했다. 근데 별로 살 만한 것들은 없었다. 구경을 하고 나와 발길이 닿는 데로 걸었더니 멋있는 건물이 나왔다. 성당인지 교회 인지 모르겠지만 공사 중이었다. 그래도 사진으로 담으니 멋졌다.

하루에 10장 이상 사진 찍기 미션이 생각보다 어렵다. 생 라자르 역 근처에선 멋진 시계탑을 보았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시계는 멈춰있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는데 찬미 언니가 왔다. 집으로 우편물이 와서 그걸 가지러 온 거였다. 저녁을 안 드셨다기에 마침 남은 밥과 육개장이 있어 데워주었다.


언니가 밥을 먹는 동안 그냥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언니는 참 바쁜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연극을 배우는데 그래도 꽤 잘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200대 1의 경쟁률로 어떤 연기 학원에 붙었다고 한다. 나는 이곳의 시스템도 잘 모르고, 연극 분야는 더더욱 몰라서 별로 와닿지는 않았지만 언니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찬미 언니는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봤다.


나는 요즘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언니와 이야기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나는 이곳 프랑스 파리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주변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좋게 해석하면 그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건데.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것도 있고, 물론 언니와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의식부터가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야기 도중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돌려 말씀하신 부분에서 기분이 확 나빠졌다. 갑자기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이상하게 그 부분이 가슴에 꽂혀서 아직까지 기분이 안 좋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가 지금 ‘행복하냐’는 것인데, 과연 지금 나는 행복한가? 방금 전까지의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행복했을 거다.


그냥 지금 머리가 좀 아프다. 충동적으로 이 집에서 나갈까, 라는 생각도 했다. 너무 편하게 사니까 몸도 마음도 해이해진 것은 아닐까. 이러려고 온 거였나. 분명 고생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왔는데.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파리에서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날이 또 오기나 할까? 꼭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해야 하나? 고생만이 값진 경험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지금 내 머릿속은 혼란하다. 내 감정도 불분명하다. 자고 싶다. 내일 다시 일어나 바람을 맞으며 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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