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98
역시나. 아침에 눈을 뜨니 생리를 시작했다. 저번 달은 괜찮더니 오늘은 시작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우선 안전빵으로 약을 하나 먹고, 아침 일과를 끝낸 뒤 방으로 들어왔다. 쉬어야겠다. 어젯밤에 감정적으로 예민해진 이유는 역시나 생리였다. 몸도 마음도 약해졌다. 쉬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할아버지께 문자를 보냈다. 몸이 안 좋아서 방에서 좀 쉬겠다고. 점심은 생각이 없으니 안 사 오셔도 된다고. 민향 언니가 외박을 해서 점심은 원래 밖에서 사다 먹기로 되어 있었다. 생리하면 입맛이 없다. 그냥 굶기로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뒹굴거리며 누워있기를 몇 시간. 슬슬 약발이 도는지 오후 한 시 즈음엔 괜찮아졌다. 배도 고파졌다. 나가서 라면을 하나 끓여먹을까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누워서 핸드폰으로 웹툰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카카오톡이 90개가 넘게 왔다. 뭔가 싶어 확인을 하려는데 내 똥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점점 늘어나는 카톡 개수를 보며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 불안해졌다. 한참이 지나 드디어 카톡 메시지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써니였다. 항상 모임을 주도하던 현아가 이번에도 우리를 다 불러 모았다. 2년 전 워크숍 뮤지컬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반갑고 보고 싶었다. 타지에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리고 고마웠다.
사실 어제 찬미 언니와의 대화 끝에 내가 이곳에 정말, 오롯이 혼자구나라고 느껴짐과 동시에 깊은 외로움이 날 괴롭혔었다. 혼자이고 싶어서, 혼자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혼자인 게 좋아서 이곳에 온 것이지만, 그걸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확인받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몸 상태도 그러니 심리적으로 더욱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아의 고마운 카톡으로, 보고 싶은 써니 오빠 동생 친구들 덕분에 돌아가면 나에겐 소속된 곳이 아주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어디엔가 소속된 존재였고, 잠시 이곳에서 오롯이 혼자인 삶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바쁜 삶 속에서 잠시나마 가지는 휴식 같은 거다. 그것도 무려 프랑스 파리에서 가지는 혼자만의 휴식, 휴가다. 이 얼마나 멋진가? 전혀 주늑 들 필요가 없다. 나는 나의 이런 면이 싫지만 좋다. 항상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나를 끌어 내려서 괴롭게 만들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극복해낼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이런 나라서 참 싫지만, 그래도 좋다.
세시 즈음 나가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얼굴은 팅팅 붓고 너무 못생겼다. 초인종이 울려 뚜왈렛인 줄 알고 나가니 할아버지께서 이제 살아났냐고 물으셨다. 대답할 힘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거린 뒤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간호조무사가 아닌 둘째 아들 가족 분들이셨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배가 고파 못 참고 내 비상식량인 신라면 하나를 부셔먹었다. 이 집의 가장 큰 단점이 방음시설 때문에 괜히 눈치 보며 생 라면을 먹는 내 꼬라지가 참 웃겼다.
이윽고 뚜왈렛이 왔다.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많은 아줌마였다. 이 사람은 꼭 안 해도 될 짓을 해서 일을 더 만드는 피곤한 스타일이다. 어쨌든 일을 끝내고 방에 들어와 좀 쉬다가 오늘따라 맛이 없는 저녁밥을 먹고 다시 방에 들어와 또 쉬었다.
오늘 밤은 파리에서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백야 축제인데. 못 간다. 안 간다. 몸이 더 중요하다. 쉬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오늘 여의도 불꽃축제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도 불꽃축제는 매년 딱 한번 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학교 다닐 때라 바쁜 것도 있었고 멀고 사람도 많고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안 갔다. 그래, 축제라고 꼭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파리에 왔다고 굳이 아픈 몸 이끌고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 스스로 위로를 하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