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피할 뿐이다.
지나치게 일정을 만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규칙적인 생활이 불안을 잠재워주는 경험을 하고 나니, 규칙적으로 지내지 않으면 불안이 커져 버릴까 봐 일정을 빡빡하게 채웠다. 교육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어려운 과목이 나타났고, 집중해도 시간 안에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해둔 계획 안에 해결이 되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교육 과정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더 써야 하는데, 이미 채워둔 빡빡한 스케줄표 사이에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자 처음 반응은 그 욕구를 외면했다.
한번 누르고 나니 불안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이 정도도 못 따라가서 어떻게 할 거냐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되는 강사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교육 시간 동안 전부 소화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나를 비난했다. 비난은 트라우마를 건드렸고, 이 과정이 끝나도 변한 것 없이 똑같은 구렁텅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해하기 위해 꾸역꾸역 앉아 있는 성실함을 보지 못하고, 익숙했던 생각패턴으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사고가 그쪽으로 돌아갔음을 인식하니, 멈출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맞다 틀리다 정의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사실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이해되었다. 교육 과정을 정말 잘하고 싶구나, 이해를 못 해서 속상하구나, 빡빡한 스케줄에 지쳤구나, 하고 토닥토닥 마음을 들어주고 몸을 쉬어주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틈이 생겼고, 어려움을 대할 때의 사고방식이 보였다. 나는 신이 아닌데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비합리적 신념이 있었다.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도와주기 전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부터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깨달았다. 지금 부족한 부분을 발견한 것인데, 과거의 비난이 덥석 발목을 잡았다. 이러면 안 되는구나 마음을 진정시켰다. 밖을 나가서 햇빛을 쐬며 가볍게 뛰었다.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불현듯 아이가 보였다. 엄마가 하고 싶은 일 한다고 바쁘다 하니, 본인에게 집중해 줄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옆에 있었다. 아이와 눈 마주치고 같이 놀았다. 남편이 즐겨보는 드라마를 아이와 셋이서 옹기종기 앉아서 같이 봤다. 신나 하는 아이 표정에서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그걸로 충분한 것이었는데, 난 무엇을 쫓아가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 왜 이리 바쁘게 사는지, 그냥 쉬면 왜 안되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인생의 방향성이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동경만 가지고 있다. 막연한 것 같아서 자꾸 미루고 싶다. 한편에서는 두렵기도 하다. 생각한 대로 이뤄질 텐데 그게 정답이 아니면 어쩌지? 또 불안이다. '~할까 봐' 병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