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 결함 그리고... 수용
#15. 다시, 인영
몸을 웅크리고
숨죽여 부르짖었다.
'싫어요.
저 헌신하기 싫다고요.
그럼 저는요!!!
제 인생은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저보고 어쩌라고요...'
더욱 괴로운 일은,
인영의 머리가 '헌신'의 가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부족한 사람.
머리와 가슴의 불일치.
그렇게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건만,
삶은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사랑과 여유가 부족하다고.'
"당신은
언제나 할 만큼만 할 뿐이야.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지. 나나 아이들에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잖아."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나도 나름 노력하는데... 꼭 그렇게 싫은 티를 내야겠어? 내가 언제 먼저 나서서 당신한테 불만을 말하거나 잔소리 한 적 있어? 당신은 왜 나처럼 못해주는데?!"
"것 봐~ 또 자기만 착한 사람이고, 자기만 잘났지. 그렇게 변명부터 하지 말고, 내 입장이 좀 돼봐. 얼마나 섭섭할지... 당신 지금 내 말에 공감을 하기나 해? 평소 얘들 감정에도 공감을 잘 못해주잖아."
"당신 기준에는 성에 안 찰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있으니 애들도 안정감 있게 본다는 생각은 안 해? 늘 장점은 안 보고 단점만 보지. 당신은 와이프가 나가서 일한다거나 저녁에 잠시만 집을 비워도 난리가 날 걸?"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나마 명분이라도 있지..."
"내가 일하기 싫어서 안 해? 나도 일하는 거 좋아해. 내가 왜 일을 그만뒀는데!"
비난과 방어가 극에 달할 때면
답답한 벽에 가슴이 눌려
너와 내가 철저히 갈라섰고,
살아갈 날이 버겁게 느껴졌다.
투사는 깊고 위협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상처받고 상처 줬던 기억이 남아서
말과 행동은 오해를 만들고
고정관념은 더욱 단단해졌져
비슷한 레퍼토리를 펼쳐낸다.
각자의 이야기에 갇혔으니,
이제 더는 서로의 이해를 구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를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결해야 한다.
인영이 이 만큼 괜찮아진 건,
괴로움이 지나쳐 마음을 보게 되고
알아차림을 배웠기 때문이다.
매번 쉽지는 않았지만 점점 나아졌다.
써 내려가던 비극적 스토리를 멈춘 후
상처 내려던 '진심 아닌 말들'을 발라내고
가까스로 돌아와 잠잠해지니
부부의 닮은 두려움만 남았다.
'사랑과 여유가 부족한 사람'
그래, 숨겨둔 마음 그곳에 문제가 있다.
그렇게 인영은 웅크리고 돌아누워 생각했다.
순수하게 사랑해서 행동한 게 아니라
해야 하니까, 의무니까....
해야 했던 일들을.
'목소리를 바꾸고 미소를 지었지.
착해지려 애쓰다가 치친 날엔
나답지 않게 만드는 사람과 상황이
전부 다 밉고 원망스러웠지.'
그 부자연스러운 가면을
가족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아쉬웠고,
그러니 유난스러울 만큼 갈구했을 것이다.
그 기대는 '나름의 노력'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결함'
근본적 결함의 해결책은
'근본의 치유'뿐.
모든 사건은 필요해서 나에게 닥친 일이라는데,
나는 무엇을 배우려고 이렇게 호되게 아픈 걸까?
그날 밤, 인영은
고통과 알아차림 사이
불편한 마음을 오가다가 잠이 들었다.
이전 같으면 미움이 커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을 텐데,
이제는 서운하면 서운한 대로 남편의 옆자리에 누워있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인영의 꿈에
강의실이 나왔다.
천정 위에는 형광등과 선풍기 등 이것저것이 달려있었다. 꿈속에서 인영은 천장을 올려보며, 하얀 타일 안쪽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상상을 했다.
'전구는 각자의 빛으로 빛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모두가 연결되어
하나의 전기로 에너지를 공급받지.'
꿈과 함께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내용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눈을 뜬 시간은 새벽 5시.
아무 일 없었던 듯 기분이 괜찮다. 옆에서 성철이 코를 골고 있는 모습마저 편안하게 느껴졌다. 인영은 먼저 잠든 아내의 손을 잡던 남편의 손길을 기억해 냈다. 이불을 덮어주고 조심조심 거실로 나왔다.
조금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덕분에 가장 좋아하는 새벽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세수를 하고 끝방 책상에 앉아 조명을 켰다.
고요함이 주변을 감싸고...
눈을 감아 호흡에 집중하던 인영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졌다가
점차 편안해지며
잠시 후,
어떤 크고 넓고 열린 마음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내게 어떤 결함이 있다 해도,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기를 원해.'
가슴과 눈가에 촉촉함이 스며들었다.
남편에게 바랐던
있는 그대로에 대한 존중,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까지도 이해해 주길 바랐던 마음들이, 사실은 내가 나에게 바라던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녹아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며 보살피는 그 넓은 마음으로.
그렇게 자기 안에서 사랑을 채우고 키우면
저절로 먼저 관심을 갖고
저절로 먼저 안아줄 수 있겠지.
가족들이 원했던
아내와 엄마의 사랑은
그런 사랑.
내가 나에게 바랐던
그런 사랑.
그래, 어쩌면 나를 버리는 일이다.
내 삶이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천정 위, 깊은 연결
나에 관한 것을 넘어선
무한한 가능성.
작은 나를 버리고
더 큰 나와
더 큰 삶이 되는 여정.
일찍 일어난 둘째가
새어 나온 조명빛을 따라와
엄마의 방 문 앞에 선다.
의자에서 내려가 몇 분간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아이를
품 안에 안는다.
그렇게 꼬옥 안고 있던
수많은 날들을 떠올렸다.
사랑은 없는 게 아니라 여기 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몰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