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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Mar 26. 2024

신념의 재구성, 감옥을 걸어 나오다.(2)

#14. 네 사람(인영, 성철, 준석, 지민)

"준석 군은 그런 거 없나요?"

일상에서 기분을
몹시 안 좋게 하는 상황이라던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어떤 신념 같은 거요.


* 신념의 재구성, 감옥을 걸어 나오다(1)에서 이어집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신념은 어디서 왔을까요?'라고 하셨을 때,

잠시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어린 시절 동생들은 거실 소파에서 뛰며 놀고 있고,

저 혼자 방 안에서 뭔가를 하던 모습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동생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란 것 같아요."


옆에서 지민이 거든다.


"선배 별명이 똑똑이였대요.

동네에서 유명했다던데요?"


"부모님은 칭찬에 인색하셨어요. 상을 받아오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게 좋았죠. 제가 잘돼서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도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그런데 성인이 되니 자랑스럽다는 개념이 좀 애매해지더라고요. 항상 기대에 못 미치니까... 그만큼 못하는 자신에게 불만이고요. 마음 한편에는 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성철이 답답하다는 듯 나선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니까? 대체 잘 는 게 뭔데?

너랑 와이프를 보면 ‘인생을 참 숙제처럼 살고 있구나’ 싶어서 답답할 때가 있어.


뭔 의미가 그리 많은 지. 무슨 대단한 사명이라도 받은 사람들처럼. 꼭 그렇게 특별해져야 마음이 놓이나?


잘한다는 게 끝이 있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 타령이야.


내 경험상 그런 사람들 치고 부모님께 진짜 잘하는 사람 거의 못 봤다. 이것저것 벌리고, 성공한다면서 걱정만 끼치고, 바쁘다며 얼굴도 잘 안 보여드리고, 정말로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부모님께서 뭘 원하실지 잘 생각해 봐야지."


너무 심했나 싶어 '아차'하던 찰나,

지민의 목소리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펴준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오빤 항상 마음이 바빠요.

같이 있을 때도 생각의 절반은 미래로 가있죠.


이것 때문에 몇 번 싸우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해요."


인영이 이해한다는 듯 말을 받았다.


"나랑 비슷하네요.

나도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게 편했거든요.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어요.

항상 뭔가 달라져야 하고,

더 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아까 준석 군의 이야기를 듣는데,

동생들 사이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려

애쓰는 한 아이가 보였어요.


부모님은 아이들의 우주죠. 당연히 아이들은

끊임없이 부모의 이해와 사랑을 갈구해요.


그런데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런 사랑을 주기가 얼마나 힘든 지요.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 세대는 더 그러셨거든요.

대부분 먹고살기 바쁘니 온전한 사랑을 쏟기 힘드셨어요. 많은 아이들이 수시로 '돈 없다' 소리 들으며 궁뎅짝 맞으면서 큰 거죠. 저도 그랬고요.


부모라면 누구나,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무의식 중에는...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잘 못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있어요. 아이들이 뜻에 잘 따라 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죠.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방식으로 우리 아이가 성공하기를 바라고요.


그러니까 준석 군도, 지민양도

부모님의 기대를 의무로 느끼지 않았으면 해요.

당연히 기대야 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예요.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죠.

그게 뭔지 잘 봐야 하고요."


옆에서 성철이 거든다.


"그렇지. 어쨌든 내가 만든 신념이고 고정관념이잖아.

부모를 원망하며 과거에 파묻혀선 안 되지.


나 자신이든 부모님이든 세상 사람들이든

누군가를 비난해서 될 일인가?


자기 스스로 변해야지."


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강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요.

나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내가 만든 생각의 굴레였음을 깨달아야 하는 거죠.


처음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 있잖아요.

'믿는 대로 보인다'


부정적 자기 신념이

우리에게 그런 세상을 펼쳐냈을 뿐.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실은 아닌 거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게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나?


수업 시간이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서류를 든 어른들이 잔뜩 들어오셨어요. 알고 보니 그날이 교육청 장학사님들의 참관 수업일이었고, 담임 선생님이 수업 평가를 받는 날이었던 거예요.


그때 갑자기 선생님이 저에게 발표를 시키셨어요.


"그럼, 인영이가 한 번 발표해 볼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죠.

순간 분명히 보았어요.


'잘할 수 있지? 네가 나 좀 살려줘라.'


하는 눈빛이요.


왠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저는 늘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든든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살았어요.


오랜 시간 모범생으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죠. 내가 좋아하는 건 안중에도 없었고요, 그냥 그게 저의 정체성이었어요. 누가 봐도 번듯하고 누구에게나 의지가 되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열심히 살았지만 어느 때부턴가 공허함을 느꼈죠.

그저 그런 평범한 현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나중에 가족들과 이야기하면서 알았어요.

 '자수성가해야지, 우리 식구 잘 살게 해야지'

의무감에 짐을 지고 살았지만, 부모님도 동생들도 한 번도 저에게 그러라고 한 적이 없다는 걸요.

나 혼자서 만든 굴레였던 거죠.


현실을 직시해라. 꿈 깨라.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니죠.


현실을 그대로 보고

지금의 나를 부족하다고 구박하지 않으며

여기에서 단단히 밟고 움직일 때

진정한 변화도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성철이 말을 받았다.


"일론 머스크,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뭐 암튼 이런 소위 대단하다는 사람들 중 누군가에 기대에 맞춰 열심히 했다는 사람 본 적 있나? 라이트 형제도, 에디슨도 자기들이 좋으니까 자연스럽게 한 길을 판 거지... 그저 그럴듯해 보이려고 노력한 사람이 어디 있어?


어쨌든 나는 어떤 조건을 달성해야만 인생 제대로 사는 거라는 생각은 영 아니라고 봐. 의지를 써서 맹목적으로 현재를 갈아 넣는 길은 한계가 있어.


잘 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주위의 기대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안 될까 봐 불안과 조급함이 늘 따라다닐 텐데,

과정이 행복해야 결과도 행복한 거 아냐?


‘자기 사랑’이란 말이 진짜 뻔하고,

뜬구름 같이 들리긴 하지만 말이야.


사랑이라는 게,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거라면,

누구보다 자신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어야지. 

안 그래?


사실 성장은 자연스러운 거거든.

그렇게 규정을 가하고 의지를 다지지 않아도

본성에 맞게 내버려 두면 알아서 더 잘 큰다고."


앞에서 지민이 눈을 반짝였다.


맞아요. ‘잘해야 해, 특별해야 해’라는 생각이

‘잘 안되면 안 된다’는 걱정과 불안을 낳죠.

그 생각이 오히려 실행을 방해해요.


아무리 의지를 다져도,

움직임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요.

고시공부하면서도 뼈저리게 느낀 부분이에요."


성철이 네 사람 앞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웠다.


“자, 한잔해 한잔 해.


내가 보기엔 말이야. 준석이 넌 일센스도 있고, 그냥 둬도 잘할 놈인데, 생각이 너무 많아. 그 생각이 단점이라고.


따지고 보면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도 네 생각이지. 안 그래? 난 그런 거 진작에 내려놨거든. 난 나에게도 기대를 안 해. 스스로 부담주기 싫어서. 하하... 내가 행복해야 부모님도 행복하신 거 아니겠어?”


“그런데 신기한 건요. 렇게 말하시는 과장님이야말로 주변에서 보면 기대 이상이라는 거예요. 사모님 아세요? 과장님 엄청 스마트하신 거? 회사에서 일 잘하시는 걸로 소문났어요.”


“야, 인마. 내가 설렁설렁하는 것 같아도 할 건 다하지.

내 스타일 알잖아? 크크. 뭐... 일 잘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지.”


“왜 소용이 없어요.

모르는 것 같아도 위에서는 아시던데요.”


“알면 뭐 해? 난 관심 없어. 회사 사람들... 다들 라인 잘 탄다고 난리인 꼴도 보기 싫고, 윗사람 분위기 맞춰주는 건 영 체질에 안 맞고. 그냥 주는 만큼 하면서 사는 거지.”


옆에서 인영이 한 마디 한다.


“내가 말한다고 들을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은 평소 하는 것보다 좀만 더  일에서 훨씬 더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뭐라 뭐라 하긴 해도 사실 일 자체는 좋아하잖아. 좀만 신경 쓰면 다를 텐데, 아무리 그래도 성취감이라는 게 있지.”


“성취감 같은 거 없습니다~

난 그냥 우리 지우 잘 크는 게 내 성취감이에요!”


그러면서 성철은 ‘조금 더 욕심을 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훨씬 더 노력해서 조금 나아지는 거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 서면서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준석은 오늘 대화가 썩 마음에 든다.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의 틈이 생기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자기답지 않게 묻어둔 이야기가 나왔다.


“일상에서 불편한 게 있는지 물어보셨잖아요.

사실은 저, 그런 게 있거든요.”


“그래요? 뭔데요?”


“아… 그러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약점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저를 싫어할 테니까요. 항상 어디서든 좋은 사람으로서 안정적인 위치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아이고, 여기서 바로 나오네.

'나의 약점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다'

그게 바로 고정관념이지."


성철은 준석이 진심으로 안타깝다.


화가 없는 사람이 있나?

아무리 화를 안내도 결혼하면 빵빵 터질 일이 많을 걸?

하하.. 이건 농담이고,


여하튼 화는 억지로 누르면 안 되는 거야.

좋은 사람 되려고 세상 사람들 다 만족시키려다가

너 자신은 썩어 문드러지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 분노가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잘 보이고, 맞춰주려고 눌렀던 '화' 말이에요.


누가 뭐라고 잘못을 지적하거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낄 때면

욱 하고 올라올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싶은 상황에서도

저 혼자 분을 삭여야 하는 경우가 있는 거죠.


물론 아마도 터진다면 혼자 있을 때 터질 텐데, 친해지면 그 모습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꺼리는 면도 있어요."


인영이 뭔가 생각난다는 듯 말을 받았다.


"아마, 스스로 어떤 메시지를 학습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울면 혼난다. 징징거리면 못쓴다.'와 같은 거요.


준석 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들이 생각나 너무 미안해지네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 제가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울면서 달려오거나 매달릴 때 얼마나 많이 짜증과 경멸의 표정을 지었는지 몰라요.


아이는 오버해서 아프다고 했어요.

 '이렇게 하면 엄마가 봐줄까' 했던 거죠.


하지만 저의 반응은 보통 이 정도로 징징거리냐는 식이었죠. 듣기 싫으니 방에 들어가라고 하기도 하고... 보기 싫으니까 반성하고 다 울고서 나오라고도 했어요.


는 게 아이들 감정 표현이잖아요. 사실 분노와 두려움은 나쁜 게 아니거든요. 바람직한 방식이 있는 게 아닌데...


윽박지르거나 하지 말라고만 했으니 아이들은 점점 더 부정적 감정은 나쁘고,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는 거예요.


저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던 말이 뭔지 아세요?

‘모든 감정은 정당하다’는 거였어요.

그동안 저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찾아온 감정에 대해 가혹한 방식으로 대했음을 깨달았죠.


이전에는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려고만 했어요.

이제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바라보고,

같이 있어주려고 해요. 

물론 연습이 많이 필요하지만요...

그러면서 알 수 없는 화가 많이 줄었고,

삶은 훨씬 가벼워졌어요.


나약한 모습도 부족한 모습도 다 괜찮아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완벽이란 게 원래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도 완벽한 준석 군을 기대하지 않아요.”


“아,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처음으로 좌절감을 표현했을 때

여자친구가 그런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고 느꼈거든요. 그때 참 편안했어요.”


“오빠는 오빠의 감정을 훨씬 더 많이 표현할 필요가 있어!”


“하하. 그런가? 그런데 사실 난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을 때가 많아서….”


지민과 준석을 이야기를 듣던 성철이

옆의 아내를 보며 씩 웃는다.


“것 봐, 나처럼 화날 땐 화난다. 기분 나쁠 땐 기분 나쁘다. 말해주는 게 훨씬 낫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인영이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이 잔잔하게 화를 내며 힘들게 하긴 했지만, 꾹꾹 참다 빵 터진 나를 크게 안아줘서 우리가 그나마 잘 지낼 수 있었어요.


난도는 높지만 남편이 제 마음공부의 일등 공신이죠. 정반대의 사람과 같이 살면 배울 점이 참 많아요.”




인영의 방해꾼은 성철이었다.

늘 지적하는 사람

내 일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


성철의 방해꾼은 직장 상사였다.

떠넘기고 괴롭히는 사람.

퇴사를 부추기는 사람.


고정관념으로 덮어 씌운 상대방은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취약함을

감소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인영에게 성철은

착실한 가해자 역할로

인영의 인내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성철에게 상사는

퇴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돼주기도 했고,

힘든 사회생활의 투덜댈 구실이 돼주기도 했다.


준석도, 지민도

모두 마찬가지


진정한 나를 잃지 않은 채

진짜 나를 보여주고

진실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다져온 습관적인 생각들과

엄격한 자기규정의 틀을 부숴야 한다.


육체를 상처 내는 외부의 공격은

피하여 몸을 보호해야 하지만


정신적 상처로 인한 고통은

자신에게 원인이 있기에


두려워도 피하지 않고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아

스스로 만든 신념의 감옥을 부수고

새로운 믿음으로 바꾸는 우리가 되기를...


순간순간 닥친 사건과 상황 속에서

질질 끌려가 긴 이야기를 만든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비합리적 신념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은

아름다운 자기 용서다.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의 나를 용서한다.


신념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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