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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6. 2024

조금 다른 사람

여기에 살고 있는, 지금을 살고 있는

표현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관련된 이해도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장애와 관련한 경험들은 단어에 굶주려 있다. (앤드루 솔로몬, 고기탁 옮김, 「부모와 다른 아이들」, 26쪽)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나는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비싼 책값에 머뭇거렸고, 도서관에서 대출하려고 했으나 대출 중이어서 읽기를 미뤘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 「타인을 듣는 시간」에서 결국 이 문장을 만났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났다더니, 만날 문장은 어디선가 만나는 법인가.


나는 조현병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해 왔다. 약물에 대해 공부했으며, 증상과 예후에 대해서 공부했고, 병원과 의료진 정보에 대해서 공부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조현병이 어렵다. 아니 아이의 증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병원을 옮긴 뒤 약을 줄이고 있는 아이는 자주 불안해한다. 불안의 정도는 얕으나 주기는 짧고, 불안의 시간은 길다. 수면 시간도 늦어졌다. 적응기인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본인의 망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추석 전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불안하냐면요. 이 세상과 똑같이 복제된 세상이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해요. 거기에는 엄마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엄마 행세를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예를 들어 ***가 아니라 **&이 있어서. 가짜 엄마가 내 엄마 행세를 할까 봐. 그래서 내가 불안한 거예요.”


아이는 불안이 잦아들자 주방에 있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그건 망상이야. 이 세상은 하나이고, 너도, 나도 유일하고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야. 불안해하지 마. 그럴 때는 이건 망상이야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 청년의 불안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이 사라지는 것 같은 절대적 불안,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 그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말해야 한다. 이런 증상으로 힘든 사람도 있다고, 이 불안에 사로잡히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겉으로는 건장한 체격의 이 청년은 이런 증상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아들은 다음날 숙모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는 제가 불안해서 죄송했어요. 추석 잘 보내세요. 숙모.” 기특한 청년, 자신의 증상 때문에 불편해했을 가족들을 기억했다.

불안이 사라졌을 때는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심사가 수시로 바뀌는 바쁜 청년. 이 불안 안에서도 이 사람은 생활하고, 자신을 돌보면서 살아간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90분짜리 수업도 하나 듣고, 분리수거도 했고, 동생이 소개한 청년 요리모임에 가입도 했다고. 나는 폭풍 칭찬해 주었다.


나는, 우리 가족은, 우리와 조금 다른 이 사람을 알아갈 것이고, 자꾸자꾸 말을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고. 여기 살고 있다고.



2023년 10월 5일, 추석 연휴가 지난 날의 일기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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