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사랑하기 위해, 출근하다
집중할 일이 없다면 서로 원망하고 비난할 것이기에, 건강한 '거리 두기'
좁은 진료실 복도 맞은편에서 노인이 걸어온다. 허리가 굽었고 몸집이 자그마한 80대 여성이다. 그 뒤로 40대 아들이 뒤따라온다. 아들이 환자다. 노인은 진료실까지 오는 길이 힘들었는지 ‘아이고’ 소리를 내며 앉는다. 늙은 엄마는 나이 든 아들에게 앉으라며 자리를 챙긴다. 저 모습이 나의 미래일까? 앞으로 이 돌봄의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오늘은 정기진료가 있는 날이다. 버스를 타고 병원 동쪽문으로 들어선다. 병원은 올 때마다 별로다. 들어서자마자 피곤이 몰려온다. 나무는 익숙하게 진료접수를 하고 채혈실로 간다. 한 달에 한 번, 나무는 채혈을 하고 혈중농도를 확인한 다음, 조현병 치료제인 인베가 주사를 맞아야 한다.
◇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인삼각 경기
지루한 대기 시간이 끝나고 담당교수를 만났다. 오랫동안 나무를 담당하던 교수가 퇴직하면서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다. 이젠 나무가 혼자 병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병원에 다녀야 하고, 우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병원에 다녀야 하므로, 나무는 자립을 해야 한다.
이번에 만난 의사는 부드럽다. 유머 감각도 있고, 나무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규,칙,생,활’을 이마에 쓰고 지내라며 제스처를 한다. 아들도 웃고, 나도 웃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인삼각 경기를 뛰는 것이 조현병 치료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호흡이 중요하다. 의사는 한 달에 한 번 만나지만, 가족은 환자와 일상을 함께 한다. 약물에 대한 반응은 안정적인지, 증상은 기복이 없는지, 부작용으로 인한 어려움은 없는지, 항상 살피고 돌봐야 한다. 그래서 조현병 가족의 돌봄은 장기전이다. 보통 청년기에 발병해서 평생 가는 질병이기 때문에, 발병 이후 우리 가족의 생활은 조현병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입퇴원을 반복하던 시절, 아이가 퇴원을 하면 집은 병동이자 학교가 됐고, 나는 간병인이자 교사가 됐다. 조현병 환자는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에 예민하며, 약물 치료로 몸이 무겁다. 가족은 부작용으로 힘든 환자를 돌보며, 환자의 증상이 촉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퇴행한 일상 습관을 회복하도록 돕는 역할을 동시 다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다시 유아가 된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전쟁이다. 약물로 인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을 깨운다. 그리고 세수하고 양치하는 것을 돕고, 새벽부터 준비해 둔 아침 식사를 하게 하고, 아침 약을 먹게 하고, 양말을 신기고, 옷을 입히고, 가방을 챙겨 학교에 바래다준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은 환자의 증상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니까. 아직 안정이 되지 않은 환자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출근도 퇴근도 없는 24시간 대기조
무사히 아침 시간이 지났다면, 본격적인 가사노동의 시간이다. 주방을 치우고, 청소를 하고, 침 흘린 옷과 수건을 빨고, 야뇨가 있었던 날은 이불세탁도 한다. 장을 봐두고, 간식 준비까지 끝내고 나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가 집에 오면 씻고 간식을 먹은 다음 그날 기분에 따라 탁구를 치거나 산책을 한다. 학교 과제도 봐주고. 그리고 저녁 식사를 챙기고, 씻기고, 저녁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당시 나는 매일 빵과 쿠키를 구웠고, 균형 잡힌 세끼 식사를 위해 요리했고, 아이의 증상을 관찰하고 운동하게 하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도왔다. 모든 일상이 나무의 질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멀쩡하게 아프기 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픈 아이를 돌보고, 큰 아이가 잠든 시간에는 아직 어린 작은 아이를 돌보고, 나무의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해서 입양한 반려견 하늘이를 돌봤다. 돌봄이 끝이 없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출근도 퇴근도 없는, 24시간 대기조 간호사이자 가사도우미였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돌보는 자의 지극한 노동은 강제되었다.
만약 앞으로 오랫동안 조현병과 함께해야 한다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헌신한다고 아이가 좋아질까? 나를 더 갈아 넣는다고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의 병이 평생 가는 질병이라면, 그 병과 함께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나와 아이의 건강한 ‘거리두기’였다. 나는 나의 일을 꾸준히 하고, 내 세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나는 책을 펼치고, 컴퓨터를 켜고, 강의 준비를 했다. 이것이 나를 돌보는 것이었고,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었다.
◇ 병원에 오는 날이 ‘맛있는 것 먹는 날’
강의를 다시 시작하고, 2012년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매일 출근했다. 남편 혼자 벌어서는 반복되는 입‧퇴원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든 것도 있었고, 나에게는 ‘엄마’ 말고 직장인,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2개를 싸두고, 과일을 깎아 식탁 위에 놓고 출근을 했다. 돌이켜보면 일을 다시 한 것은 나무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됐다. 일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 출근해서 집중할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나무의 병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원망하고 서로를 비난했을지도. 가족은 따로 또 같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특히 가족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더더구나 그렇다. 가족은 지나치게 뜨거운 관계이기 때문에 거리를 잘 유지해야 사랑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사랑과 돌봄 노동 사이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고.
오늘의 진료가 끝났다. 약국에서 한 달 치 약을 받았으니 우리에게 또 한 달이 주어졌다. 우리는 병원에 오는 날을 ‘맛있는 것 먹는 날’로 정했다. 오늘의 메뉴는 떡볶이다. “엄마, 나는 엄마하고 데이트하는 날이 좋아요. 우리 다음달에는 뭐 먹을까요? 나는 햄버거, 햄버거로 정했어요.” 그래. 우리 다음달에도 맛있는 거 먹자. 아들.
<한겨레21> 1508호, 2024.4.1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