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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n 04. 2024

괜찮아, 2막이 시작될 거야

조현병 재발 이후 귀향까지 7개월

2014년 3월이었다. 대안학교 고등과정을 마치고 학교밖 청소년으로 지내던 나무가 갑자기 일본에 가겠다고 했다. 자전거 디자인과 정비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도쿄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방도 아니고 바다 건너 외국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이제 겨우 치료제를 정하고 조금씩 안정되고 있는 중인데?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무의 생각은 완강했다. 아프다고 하고 싶은 걸 포기할 수는 없다고, 실패하더라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담당 교수도 반대한 도쿄행     


우리는 자전거전문학교 한국담당자와 소통했다. 우선은 일본어가 준비돼야 한다고. 당장 등록할 수 있는 일본어학교를 알아보고, 유학생 비자를 알아보고, 대출을 받았다. 계속되는 입‧퇴원으로 재정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나무가 하고 싶은 공부에 지원하기로 했다.


병원 진료를 하고 담당 교수님과 의논했다. "어머니도 같이 가는 건가요?" 교수는 물었다. "아뇨. 돈 벌어야죠." 나는 말했다. 교수는 나무의 도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나무는 해 보겠다고 했다. 담당교수와는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에 와서 진료받기로 약속했다.


나무는 사흘 만에 짐을 싸서 도코 행 비행기를 탔다. 어학교의 3평짜리 기숙사 방을 정리하고 살림살이를 챙겨줬다. 부산쯤 간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무는 파주에서 타던 자전거를 분해해서 가져갔다. 도쿄 시내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베트남 친구, 독일 친구, 중국 친구들과 함께 일본어를 배웠다.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도쿄에 가서 나무의 상태를 확인하고 살림을 챙기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무는 3개월에 한 번씩 진료를 받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냈다.


결국 나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고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 1년 동안의 도쿄 생활은 일본어 공부를 한 것, 병원 생활 하는 동안 경험하지 못한 넓은 세상을 경험한 것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무의 귀향은 순조롭지 않았다.

 

귀국 보름 전, 일본어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나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도쿄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우리는 나무를 도쿄의 어느 경찰서에서 찾았다. 나무는 자신의 상태를 낙관했고, 자의적으로 단약했다. 나무는 재발했고, 일본 현지 병원에 입원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가 입원했던 마쓰자와 병원이었다. 


이때 어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이 컸다. 선생님들은 경찰과 병원에 나무의 상태를 설명하고, 나무가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본은 우리와 다르게 경찰서에 있는 사람을 가족들이 만나지 못한다. 변호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그 역할을 어학교에서 했다.     


처음 시도해본 전기경련치료     


낯선 일본 땅에서 재발한 나무를 위해 우리는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어학교와 소통하고, 지인을 통해 한국 대학원생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하루가 판단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나무의 자취방 짐을 정리하고, 도쿄 성당에서 혼자 미사를 드리고, 흐드러지게 핀 우에노 공원 벚꽃 아래를 걸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울면 안 된다, 감정에 휩싸이면 안 된다고 주문을 외웠다. 그래도 자취방에서 혼자 쪽잠을 잘 때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드디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나무를 면회할 수 있었다. 불안한 눈빛, 보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갑자기 말라버린 몸,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압도당한 표정이었다. 엄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왜 왔냐고 물었다. “집에 가야지, 집에 같이 가려고 왔지.“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일본 의료진에게 기존 처방전과 복용약을 보여주고 그대로 진행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의사는 난색을 표했다. 이 용량까지 올리면서 안정되려면 최소 6개월이 걸린다고. 대신 전기경련치료(ECT‧Electroconvulsive treatment)로 급한 증상을 잡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정도가 되면 한국에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6개월이라, 말도 통하지 않는 도쿄에서 지내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전기경련치료라, 낯선 나라에서 낯선 치료를 해야 한다니 불안이 컸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장면도 떠오르고. 이게 잘 하는 결정일까 고민이 깊었다. 폭풍 검색을 했다. 전기경련치료는 난치성 우울증, 조현병 환자들이 약물과 병행하는 치료법이고, 노인이나 임산부 등 약물복용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적용한다고 했다. 불안하지만 해볼 수밖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그 다음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새로운 치료에 동의했다.


나무는 12번의 전기경련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환자석에 앉아 오는 내내 양쪽으로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김포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나무가 돌아왔다살아 있다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우리는 다시 팔방으로 알아봤다. 응급으로 협력병원에 입원하긴 했지만, 소아청소년 임상겸험과 클로자핀 약물 전문성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나무의 주치료제인 클로자핀의 전문가로 알려진 교수가 퇴임하고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클로자핀의 임상사용의 실제>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정보다. 그 병원이라면 집에서도 가깝다. 당장 전원 절차를 밟았다. 담당교수는 전기경련치료를 병행하자고 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결정은 쉽다. 전기경련치료 덕분에 김포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우리는 의사의 제안에 동의했다. 16번의 전기경련치료를 하면서, 약 용량을 조금씩 올렸고, 주사도 맞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원했다.  


도쿄에서 사라진 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이때가 2015년 10월이었다. 다 괜찮았다. 나무가 돌아왔으니. 나무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나무가 살아있으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쓰러지면 또 일어나고, 1막이 끝나면 2막을 시작하면 되니까 말이다.     


*브런치북 17화, 19화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한겨레 21> 1516호, 2024.6.1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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