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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26. 2024

밝은 밤

봄에서 여름으로

엄마와 딸: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밝은 밤』 / 최은영 / ㈜문학동네 / 2021     

   

   백화점에 ‘엄마와 딸’의 사연을 적어 응모하면 예쁜 스튜디오 사진도 찍어주고 유럽 여행도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성공한 전문직 여성을 모델로 내세워 자신을 성장시킨 엄마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화점의 주력 고객인 30대 여성에게 소구력이 높았다.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딸이 친정엄마를 그리는 사연이 많았다. 그들의 삶에 그렇게 못다한 이야기가 많았는지 심사 담당자는 눈물을 훔치며 유럽 여행 대상을 선정해야 했다. 사연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밝은 밤』 의 주인공이 이 말을 하는 대상은 엄마가 아니라 친구 지우였다. 또한, 증조할머니 삼천은 친구 새비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내가 그러지를 못했다

인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갔니미안해”      

   우리가 알고 있고 규범화된 가족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조건 없는 사랑과 화해의 모습을 친구와 감정 교류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 엄마의 태도에 대해서는 차갑게 평가한다.     


이상한 일이야,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게"     

   최은영 작가의 작품 『밝은 밤』에는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엄마와 딸의 반복되는 고난은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병든 엄마를 버리고 도망쳤던 증조할머니, 백정의 딸로 사기 결혼을 당한 할머니, 그 영향으로 호적조차 불안한 엄마, 그리고 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 속에 모범생으로 살아야 했던 딸의 이혼. 그리고 그 사연에 오버랩되는 야만의 시대. 식민지배와 전쟁, 남편의 전제와 무능력까지……. 몇 년 전 단편집 “『쇼코의 미소』에서 만났던 작가의 감수성을 장편으로 다시 만나 반갑다. 극적인 묘사나 엄청난 문장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작은 말 한마디로 독자의 감성을 툭 건드리며 다가온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그렇다. 태어날 때 처음 본 두 사람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자신이 누구를 베고 있는지 모를 칼을 휘두르게 하고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친구인 새비에게, 지우에게 하는 말을 차마 엄마에게는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합리화한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엄마라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안 순간은 항상 늦는다. 그래서 친정엄마에게 쓰는 사연은 절절하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나는 이게 꿈이에요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엄마는 딸에게 평범하게 살라 하지만 그것은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남들이 하는 것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결혼도 잘해야 하고, 아이도 잘 키워야 한다. 그중 어느 하나가 잘못되면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된다. 그 모든 것을 다 잘 해낸 사람은 없음에도.. 엄마는 그 평범함을 성취하기 위해 인내하라 한다. 


   반면, 새비 아주머니는 그 딸 희자에게 가능한 한 멀리 가라고 했다. 거기에는 가족의 무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는 의미도 있다. 엄마들이 살아온 질곡의 삶을 반복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는 당부였다. 돌아오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것이 가난한 엄마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딸의 생이 가족의 굴레로부터 독립할 때 진정한 엄마와 딸의 동행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잘 알기에 마주 보고 상처를 내는 것보다는 미래의 방향을 보고 묵묵히 걸어 가는 것을 택했다. 그렇지만 그 딸 희자의 삶을 버틴 그리움에 대해서도 연민. 그것 또한 상처이다.         

   

   그렇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연결되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할머니와 엄마의 갈등은 딸이라는 완충 지대를 통해 해소되어 간다. 딸이 전하는 엄마의 소식을 듣고, 딸이 입원한 병원에서 엄마를 보고, 딸과 대화하며 미뤄두었던 숙제 –언니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를 마무리하며 할머니와 다시 연결된다. 아니 그냥 다시 본다. 20여 년간 두 모녀가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를 미워한 것은 아니다. 그냥 가장 믿는 사람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했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품이었기에 나중으로 미뤘을 뿐이다. 그것이 엄마와 딸이다. 그것이 가족이다. 엄마를 이해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딸의 상처를 메만지고 싶지만 덧날까 두려운 마음이다. 


   백화점은 더 이상 ‘엄마와 딸’ 사연 공모를 하지 않는다. 어느 해 부터인가 심사 담당자가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사연을 보내는 주체가 30대 여성들이 대부분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달라졌다. 친정 엄마가 주인공인 사연은 거의 없다. 모두가 자기가 주인공이다. 자기가 어린 딸을 얼마나 잘 키우는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딸이 얼마나 이쁜 짓을 하는지가 중심이다. 감성을 잃은 담당자는 우수작을 선정할 수 없다. ‘엄마와 딸의 아름다운 동행“을 때려치우기로 했다. 그냥 알아서 예쁜 사진 인스타에 많이 올리시라고요....     

  최은영 작가의 작품은 풍파의 세월을 견딘 어머니들과 애틋한 모정에 대한 마지막 앤솔로지이며, 그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딸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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