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포를 풀 겨를도 없었다.
엄마는 어제 도착하자마자부터 잠시도 쉴 틈 없이 전쟁터 같은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스들을 비우고 펼치고,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살림살이는 두서없이 엉망진창에 박스는 또 어찌나 많던지.
지난 4개월 간 일부는 창고에 처박혀 있었고, 일부는 중간중간 꺼내 쓰고, 필요한 걸 찾느라 상자마다 마구 파헤쳐놓아 정말 엉망이었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집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동안 밀린 업무들을 보러 다녀야 했다.
아이를 엄마에게 맡겨놓고 서둘러 집을 나서 보호소로 향했다.
10시에 G를 만나 급한 일부터 처리했다.
1. 잡센터에서 온 서류들 훑어보기
새로운 신청서가 들어있는 걸로 봐서 잡센터에서 보조금을 받으려면 3개월에 한 번씩 신청서를 갱신해야 하는 것 같았다. 잡센터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잘 읽고 제 날짜에 내라는 걸 내지 않으면 보조금이 끊긴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이게 그것인가 보다.
신청서류는 앞뒷면 가득 3장인데 나 혼자서는 작성할 수가 없다. G가 작성해줬고 나는 복사본을 달라고 했다. 언제까지 그녀가 도와줄 수는 없기에 복사해뒀다가 틈나는 대로 혼자 공부할 요량으로..
2. 인터넷 신청 해지하기
주변 친구들에게 진작 부탁했지만, 그녀들은 나에게 바쁘다며 직접 전화를 걸어 해지하라고 했다. 친구 한 명이 무료상담전화번호까지 알려줬지만, 나는 자동응답기가 대답하는 그 내용을 이해하고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내가 이해를 못해 몇 번이고 듣는 사이에도 내 핸드폰 요금은 무섭게 나가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서비스팀에 이메일을 보내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돌아온 답신은, 당신의 주소와 이름을 고객 리스트에서 찾을 수 없다는 내용뿐...
G에게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직접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이메일 내용처럼 내 고객정보를 찾을 수 없다고 하더니 이내 서류를 찾았다며 계약이 아직 성사되지 않았으니 바로 취소를 해주겠다고 했다.
인터넷 설치 신청서를 우편으로 보낸 지 3주 정도 되었는데 아직도 신청이 되지 않았다니..
느려 터진 독일 시스템 덕을 이렇게 톡톡히 보게 될 줄이야.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이미 계약이 성사되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2년 약정에 묶여 해지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 넘게 잠 못 자던 일이 해결되었다ㅠㅠ
3. 아이 유치원 등록하기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유치원 자리를 알아보려면 먼저 특정 웹사이트 시스템 안에 등록해야 한다. 거기에 가입을 하고 우리 정보를 입력하면 집 근처 유치원과 어린이집 목록, 홍보내용, 빈 자리 여부까지 손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이트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인 데다 내 경우, 이메일은 내 걸로, 비밀번호는 남편이 만들어놓아 비밀번호를 찾을 수 없었다.
G와 함께 사이트에서 하라는 대로 비밀번호 재발급을 받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새 비밀번호 인식이 되지 않았다. 3번을 해도 인식이 되지 않아 유겐트암트에 전화를 거니 새 이메일 주소로 아이디를 만들고 새로 시작하라는데, 나는 이메일 주소가 하나뿐이다.
골치 아팠다. 그녀는 결국 자기가 해결해줄 수 없으니 유겐트암트 담당자를 찾아가라고 연락처를 알려줬다.
4. Stadt werke에서 온 서류 읽기
슈타트베아케는 한국전력 같은 곳 같다.
15장 정도 되어 보이는 서류뭉치가 우편으로 왔는데 온통 숫자들에 계약서 조항 같은 것들도 적혀있었다.
아마도 매달 내야 할 금액을 적어 보낸 것 같은데 정확히 G에게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 전 세입자가 썼던 금액 평균을 토대로 전기세가 책정되면 매달 그 액수를 내야 하고, 자동이체를 신청하려면 신청서류를 작성해 직접 갖다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첫 세 달 동안 내가 그 전 세입자보다 적게 사용한 경우 하우스 마이스터에게 연락해 금액을 줄여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니 첫 3개월을 유의하라고 했다. 그 서류에는 앞으로 1년 동안 매달 돈이 빠져나가는 날짜도 정확히 나와 있었다.
또 라디오, 티브이 관련 신청서류도 있었는데 그것도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거라고 알려줬다. 서류 설명해달라고 왔다가 작성할 신청서가 두 개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5. 면허증 바꿀 서류 준비하기
위에 네 가지 볼 일 보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사관에서 서류 다운로드하여 프린트하고, 신분증 복사하고, 면허증 번역해서 작성한 서류와 함께 대사관에 보내 공증받고 독일 교통청에 면허증 교환을 신청해야 하는데 당분간은 너무 바빠서 면허증은 신경도 못 쓸 것 같다...
볼 일을 보고 나니 이미 11시 반이었는데 관공서는 12시까지다. 잡센터에 서류도 내야 하고, 슈타트베아케에 서류도 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경찰서에 돈 잃어버린 걸 신고했기 때문에 그 시각에 보호소에 있었던 사람들 풀네임과 주소를 적었다가 경찰서에서 편지를 보내오면 출두할 때 가져가야 하는데 베트로이어린에게 명단을 물어보니 자기들이 알려줄 수 없고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지금 그걸 일일이 물어가며 적어갈 시간도 없거니와 그녀들도 보호소에 있는 사람 반, 없는 사람 반이었다. 어차피 찾지도 못할 돈, 괜히 신고해서 일만 복잡해졌다...
일단 나와서 어디를 먼저 갈까 하다가 30분에 한 대 오는 슈타트베아커에 가는 버스가 바로 오길래 거기 먼저 갔다.
비가 내렸다.
이럴 때 아이가 있었다면 유모차 커버 씌워 밀고, 나도 우산 쓰고, 가방 한가득 서류더미 매고 종종거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엄마가 집에서 봐주고 있으니 너무 쉬웠다.
슈타트베아커에 신청서류를 내고 잡센터로 뛰어오면서도 너무나 가벼워 웃음이 났다. 아기가 없어서 즐겁다는 게 아니라 아기 없이 맨 몸으로 볼일을 보고 다니는 건 정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빠르고 간편했다.
유모차 탄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건 양쪽 발목에 3킬로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힘겹게 짐수레를 밀고 다니는 것 같다면, 가방을 메고 우산을 썼어도 혼자 몸으로 다니는 건 마치 날개를 달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잡센터에 도착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 서류를 내고 나니 11시 57분이었다. 나는 온 김에 담당자를 만날 테아민을 잡고 싶다고 했다. (선불폰 해결이 안돼서 전화로 테아민 잡는 일도 다 돈이라...)
G도 아직 못 찾아낸 내 담당자였다.
재미있는 게, 여기는 나에게 돈을 주는 담당자 따로, 직업 관련 담당자 따로인데 그것마저도 내가 집을 구해 보호소에서 이사를 나오면서 다시 바뀌었다고 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새로운 담당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담당자를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고, 전산을 확인하던 데스크 직원은 내 담당자는 자리에 없고 팔 매니저가 아직 자리에 있으니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봐준다고 했다.
점심 먹고 퇴근할 시간에 누가 만나줄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 사람이 만나주겠다고 했다.
12시.
관공서가 문을 닫는 시간에 나를 만나준 그 사람 덕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