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빠 없어

by 뿌리와 날개

일요일 오후 친구가 딸내미와 함께 놀러 왔었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난 뒤 저녁 먹고 침대에 누워서 함께 뽀로로를 봤다.


보통은 2편 정도 보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한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빈이 졸려." 라며 먼저 뽀로로를 그만 본다고 했다.


빈이와 나는 양치와 세수가 끝난 뒤 침대로 올라와 새 기저귀로 갈고, 잠옷을 입고, 로션을 바르고 물도 한잔 마신 뒤 잠들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빈이가 좋아하는 책도 함께 읽고, 요즘은 뽀로로도 함께 본다. 오늘은 잘 놀았는지 내일은 뭘 먹고 싶은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시작해 대화도 많이 하고, 뽀뽀도, 부비부비도, 간지럼도 실컷 하고..


오늘도 여느 때와 같았다.


그저께부터 빈이는 뽀로로를 보면 인상 깊었던 장면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아까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내 팔을 베고 누워 방금 전 본 뽀로로 내용을 중얼거렸다.


"에디 풍선 떨어졌어. 에디 풍선 떨어졌어."


부쩍 말이 느는 게 기특해서 나 역시 기쁜 맘으로 빈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며 반응을 해줬다.


에디 풍선이 떨어졌다는 말만 열 번도 넘게 반복을 하더니 "하빈이 리프케 좋아."라고 했다. 조금 전에 리프케가 다녀간 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하빈이 리프케 좋아? 엄마도 리프케가 좋아." 하며 빈이 뒤통수에 뽀뽀를 해줬다.


빈이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더니 이어서 "하빈이 비프케 아줌마 좋아." 도 몇 번 하고, 그다음에는 "하빈이 할비야 좋아. 하빈이 엄마 좋아." 하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물론 나도 문장마다 빈이 말을 따라 하며 대꾸했다. 빈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열거하는데 한국 사는 할머니까지 언급을 하니 엄마로서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빈이가 갑자기 돌아눕더니 침대에 납작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붙인 채로 내 얼굴을 빤히 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아빠 없어."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머리가 띵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며 2-3초간 정적이 흘렀고 빈이가 다시 말했다.


"아빠 없어."


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해야겠는데 당최 머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다 결국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고작,


"하빈이 아빠 기억나..?"였다....


"응."


"하빈이... 아빠 보고 싶어?"


"응."


"근데 하빈이 아빠가.. 없어?"


"응."


더 이상 우리 인생에 남편은 없다고 했지만, 아빠가 없다는 내 아이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그 말간 눈을 쳐다보며 나는 "어, 맞아. 너 아빠 없어."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왔다. 스탠드를 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 표정을 다 읽는 아이인데, 그렇게 당황한 내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었을 테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티 안 나게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냐. 빈이가 왜 아빠가 없어. 빈이 아빠 있어. 빈이 아빠가 지금은 일이 있어서 바빠서 못 오는 거야. 빈이도 아빠 있어. 알겠지?"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변명을 하고 말았다. 우리 아이는 더 이상 아빠가 없다고 지난 3개월간 나 스스로 만인에게 공표했으면서...


아빠가 없다는 아이의 한마디에 저렇게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응."


빈이는 심플하게 대답하고는 2-3초 뒤에 다시 몸을 틀어 베개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창 밖을 바라보며 다시 "에디 풍선 떨어졌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마디 더 하고는 1분도 채 안되어 잠이 들었다.


마치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느냐는 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생각해도 묘한 일이다.

빈이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기에는 "아빠"라는 단어는 너무 튄다.


공교롭게도 나는 오늘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동화책을 읽어주다 보면 가끔 아빠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영 불편하다고... 엄마, 아빠, 아이 셋이 주인공인 동화책은 아무래도 읽기 꺼려진다고.


그래서 그동안은 아빠 부분은 빼고 읽으며 아빠라는 단어를 애써 피해왔는데, 계속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빈이가 유치원에 가서 "아빠가 뭐야?"라고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요즘은 일부러 피하지는 않는다고...


그래도 다른 단어들에 비해 아빠라는 말은 그 사용빈도수가 정말 적다. 독일에서는 아이 친구들 부모를 가리킬 때에도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두세 살 짜리 아이 친구들에게 빈이 엄마가 아니라 그냥 내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지금 적으며 보니... 아빠 없어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주어가 없다.


빈이는 자기 마음을 표현한 거의 모든 말에 하빈이라는 주어를 넣는데 아빠가 없다는 말에는 주어가 없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걸까.


하지만 의미 없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그 전 문장들에 이어서 나오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너무 뜬금없기도 하고, 하필 그 말이 "없다"라는 말과 함께 붙어 나온 것도 그렇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에는.. 좀 그렇다 난..








11월쯤, 우연히 남편 사진을 보고는 아저씨라고 했었다. 몇 번이고 되물어도 아저씨라고 한 걸로 봐서 이미 아빠의 얼굴은 잊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빠라는 개념은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지난 몇 달간 내가 아빠라는 단어를 일부러 피했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다가 요 근래 들어 종종 아빠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마음에 남아있었나 보다.


그러다 오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열거하다가 문득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졌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물론 "아빠 없어"라는 빈이의 그 말이 우리 어른들이 받아들이는 만큼 무겁거나 커다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으며 저려왔던 것처럼 빈이 가슴이 아팠을 리도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하지만 유추해보건대, 빈이는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가고 한동안 아빠를 잊고 살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아빠의 부재를 인지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엄마와 나의 곁에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내 일찍이 이런 날이 곧 올 줄 알고 어찌해야 할지 지난 반년 간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아직 그런 날은 멀었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22개월 이틀째에 아빠가 없다는 말을 했다.


내가 늘 상상해왔던 "엄마, 왜 나는 아빠가 없어?" 라거나 "우리 아빠는 어딨어?" 같은 송곳 같은 질문은 아니었지만, "아빠 없어"라는 그 말은 참...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보통 나도 같이 살짝 잠이 들어서 다시 일어나기가 정말 싫다.


그래도 설거지며, 청소, 분리수거 및 빨래 같은 집안일에 내일 먹을 요리를 해놓고 공부도 좀 해야 하니 늘 힘겹게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은.. 빈이가 평소보다 유난히 빨리 잠이 들었는데도 나는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빈이가 언제든 원하면 나에게 아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키울 생각이었다.


엄마가 그런 말을 일부러 피하거나 당황하거나 아이들 질문에 불편해하면 아이들도 금세 그걸 눈치채고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궁금해도, 묻고 싶어도 일부러 참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 가슴에 "엄마를 아프게 하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알고 싶을까"하는 죄책감으로 남아 세월과 함께 곪고 썩는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빈이가 아빠에 대해 언제 어느 때 물어도 침착하게, 안정된 얼굴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다 말해주리라 생각했었다.


아이가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면 자존감에 큰 문제가 생길 테니 그렇지는 않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를 미화한다면 아빠에 대한 환상이 생길까 봐, 더 나아가 그런 좋은 아빠와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도리어 내 탓으로 돌릴까 봐 그렇지도 않도록 그 적정선을 잘 지켜 좋은 방향으로..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강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닥치고 보니 사랑하는 나의 아이에게, 너는 아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만큼...


고작 22개월 밖에 안된 내 아이가 그 작고 사랑스러운 입으로 말을 배워가는 시기에, 하고 많은 그 예쁜 말들 다 놔두고 아빠가 없다는 말을 하게 만들다니..


참..


마음이..


아프다....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6년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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