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9. 자원봉사자로서의 커뮤니티 빌딩
<챕터 9 미리보기>
- 결정이 어려울 때에는 몸에게 물어보라
- 가슴이 맞닿는 긴 포옹을 충분히 해라
- 마음에 결심이 섰다면 더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
-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면 옳은 선택을 했다는 증거
- 나보다 더 큰 것을 느끼는 경험을 해라
***
“우리 취소가 났어. 더 있고 싶으면 한 달간 더 있어도 돼.”
시타델 주인인 옐레나가 다가오더니 떠나기 이틀 전에 나에게 그런다. 프랑스에서 예약한 기간의 마지막 날이 점점 더 다가왔다. 월요일에 떠나는데 토요일부터는 마음이 달라지더라. 나도 모르게 말수가 적어짐을 느꼈다. 내가 떠나갈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와중에 연장의 기회가 오니까 순간 혹 하더라도 중심을 잡게 된다. 더 있어? 아니, 내 몸이 이미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떠날 때가 되었다.
클라이밍과 아크로요가를 나에게 가르쳐준 친구가 너무 매력적인데, 그 친구는 연애할 생각은 없어서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도 자꾸 끌리는 나를 보며, 아, 계속 있으면 안 되겠다. 끌려가겠다. 내가 원하는 나는 다 잃을 것이 느껴지니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겠다는 것이 확고해졌다. 연애할 생각이 없는 이에게 자꾸 끌리는 것은 애초에 나에게 더 치유할 것이 있고 그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해서, 다만 이 곳에 이 친구와 같이 있다가는 나는 자기객관화와 성찰, 치유의 기회를 놓치게될 터였다. 계속 그 영향 안에 있으면서 휩쓸리는 중에 치유는 못해 난. 또 이미 잡아둔 일정도 있었고.
썬앤코에서 첫 동료가 된 이들 중 한 명인 제시카와 영국에서도 보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도 봤는데, 이번에는 취리히에서 펫시팅을 하면서 같이 지내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고양이 한 마리를 돌보면서 제시카는 일을 집중적으로 할 계획이었고, 나는 그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펫시팅, 하우스시팅은 무료 숙소를 구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펫시터, 하우스시터를 찾는 전문 웹사이트에 계정을 만들고 호스트들이 올린 내용들을 살펴본다. 기간은 얼마나 되며, 위치는 어디이며, 고양이 강아지가 몇 마리이고, 조건들을 확인하고 맞는 호스트에게 연락을 한다. 전화통화나 영상통화도 하고, 이제까지의 이력들에 대한 얘기도 하고, 펫시팅 하우스시팅 경험이 있으면 해당 호스트의 연락처를 전달받아서 체크하는 과정들도 거친다. 그렇게 해서 매칭을 확정지으면 끝! 매칭이 되기까지 아주 쉽지는 않지만 무료 숙소가 주어진다는 매력이 크다. 처음에 뚫기가 어렵지 레퍼런스가 있으면 나름 쉬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시카의 경우에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소개받은 경우였고, 미리 집주인에게 내가 같이 와서 지낼 것임을 이야기해놓은 상태였다. 취리히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나 좋은 도시다. 내가 질색할 정도로 복작이지는 않고, 견딜만한 정도의 인구밀도로 느껴졌다. 브리앙송에서 매일 같이 꾸준히 하던 아크로요가를 계속하고 싶어서 알아봤더니 취리히에도 아크로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매일 모여서 자유롭게 연습을 하는게 아니겠나. 아싸. 기차역에서 동네 한 달치 정기권을 구매하고나서 바로 찾아갔다.
그렇게 처음 2주간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아크로요가를 하러 나갔다. 스페인 썬앤코에서부터 내가 집중적으로 해왔던 것 중 하나는 포옹인데,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는 하루에 네 번의 포옹이 필요하고, 현상유지를 위해서는 여덟 번, 성장을 위해서는 열두 번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냥 대애충 하는 포옹 말고 정말 서로를 꼬옥 안아주는 조금은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포옹이 진짜다. 상대방을 꼬옥 껴안았을 때 가슴이 따땃해짐을 느끼거나, 너의 오늘 하루를 축복해 하면서 마음을 전하는 포옹, 나를 감싸안아줘 하고 나를 받아주길 요청하는 포옹 등등. 코리빙에 있을 때는 굳이 세지 않아도 이 수를 채우는게 사실 어렵지 않았는데, 제시카하고 둘이만 지내니까 아크로요가를 하러 나가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피부의 온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주말에는 친구의 전남친 생일파티에 놀러 호수에 가서 수영에 바베큐에 잔뜩 즐기기도 했다. 정말 도시라기엔 너무 예쁜 곳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아쉬움이 자꾸 슬금슬금 나오더라. 자연에 완전 포옥 파묻혀 지내다가 도시로 나와서 기차를 매일매일 타다보니 다시 완전 산 속에 파묻히고 싶은 마음이 커져나갔다. 산이 그리워. 난 정말 서울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만 자란게 맞나 모르겠다 싶다. 중고등학생 시절은 대전에서 보냈다만. 도시에서 진절머리가 난 게 맞나봐.
브리앙송에서 친구가 그랬었다. "7월에 스위스에 갈거야, 내가 아는 애들이 코리빙을 오픈하려고 지금 집을 수리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 브리앙송에서도 처음에 코리빙 오픈할 때 와서 고치고 하는 일을 도와주다가 여기에 푹 빠졌잖아. 나의 땀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새로운 시간과 추억들이 쌓여가는 걸 보는 건 정말 의미가 크다는 걸 알게 됐거든. 다시 느껴보고 싶어."
그 코리빙이 산에 있다고 했는데. 알아볼까. 코리빙 전문 앱 맵멜론(Mapmelon)에 들어가보니 띠로리. 운명인가. 최상단에 바로 그 코리빙에서 숙박을 무료로 하는 대신 하루 일정 시간 인테리어를 도와주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못 온다고 해서 대신할 사람을 찾는다고 글을 적어놨다.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나 누구한테 얘기 들었고, 맵멜론에서 너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봤어. 그랬더니 통화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 작년에 안세우에도 있었어~”
“어? 우리 거기에 9개월이나 있었는데 그럼 아구스랑 아프리도 알겠구나!”
“알지알지~”
“잘됐다. 그럼 언제 올 수 있어?”
“오늘도 갈 수 있고, 내일도 괜찮아.”
“????”
만나서 들은 얘기지만, 지금 당장 올 수 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랬다고 한다. 내가 그렇다. 마음에 무언가가 정해지면 몇 단계는 건너뛰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때가 있다. 반대로 어마무시하게 밍기적거릴 때도 있지만. 벤과 파비엔은 스위스커플로 밴을 타고 여행을 했는데, 내가 일년 전에 지냈던 안세우코리빙에서 본인들이 꿈꾸던 코리빙의 모델을 보고 스위스에 돌아와서 버려진 호텔건물을 사고 알피니스 코리빙(Alpiness Coliving)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호텔은 이 스위스 커플의 부모님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운명이런게 이런거지. 나는 다음 날 바로 합류하기로 했다. 제시카는 내가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을 아쉬워 했지만 이해해주었다.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산 속 계곡으로 들어가는데 아, 돌아왔다. 산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느낌이 포근했다. 흔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는 그림 같은 풍경이 보여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바깥 풍경에 취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가 아 저 건물이겠구나 하고 걸어갔다. 내가 맞았다. 인사를 하고 둘러본다. 진짜 공사 중인게 엄청 티나네. 실실 웃음이 나온다. 재밌을 것 같아.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설명을 들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들. 페인트칠, 목공일, 청소, 그리고 돌아가면서 만드는 저녁식사. 하루에 세 네 시간 정도 레노베이션 일을 도와주고 남은 시간에는 개인의 자유다. 나는 일이 있으니까 일을 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같이 등산도 가고 산책도 갈 수 있다. 안세우코리빙처럼 우리는 돌아가면서 저녁식사 당번을 했다. 저녁을 다 먹고나면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었다. 취리히보다 훨씬 추운데도 따뜻해.
스위스의 멋드러진 산들을 배경으로 업무 영상통화를 했다. '아니 어디야, 옮겼어? 너무 멋있다'는 인사가 좋았다. 이런 자연이 지겨워질 수가 있을까. 매일매일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 피곤해져도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별을 보면 또 피곤함이 옅어진다. 밥을 먹고나서 게임을 하면 열을 올리다가도 웃음 한 번에 김이 솩 빠진다. 조금씩 변해가는 방의 모습도 신기하다. 나중에 완성되면 무슨 모습이려나. 나는 이번에 끝까지 다 보지는 못 할텐데. 다음 번엔 언제 여기에 다시 돌아오게 될까. 완성된 모습을 그 때는 보겠지.
산 속에서의 2주는 매일매일 느리게 흘렀다. 되돌아보면 자연 속에 깊이 있으면 있을 수록 시간은 더디게 다가오는 것 같다. 나 꼭 돌아올게. 나 완성된 모습 너무나 보고싶어. 레노베이션renovation 참여하는 게 이렇게 뿌듯할 줄 몰랐어. 진짜 너무 기분 좋다. 완성된 결과를 보는 게. 하우스 레노베이션 리얼리티 티비쇼들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아. 보는 것도 재밌지만 해보는 건 더 재밌네!
나는 항상 몸을 써가며 땀을 흘려 하는 노동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서도 농장일을 하는 것을 너무나도 고대했었고, 실제로 농장에서 양털깎이 보조일을 1년 이상 하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일수만 채워서 시골을 금방 떠났지만 나는 눌러앉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1차산업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나 할까. 버려진 호텔건물을 새롭게 단장하려 보수공사를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작업이기는 했지만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고 정직하게 땀을 흘려서, 몸을 쉼없이 움직여야하는, 어느 순간에는 명상의 상태에 이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작업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머리를 비우게 돼.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온전히 머리 외에 움직이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이 많다.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어.
그 외에도 돈을 내고 숙박을 하는 사람으로 지내는 것과 나의 (피)땀(눈물)을 쏟아내어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차이가 있더라. 물론 게스트로 지낸다고 하면 숙박비로 내는 돈도 (피)땀(눈물)에서 나오기는 한다마는. 함께 무언가를 일구어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함께 쌓아가는 것이 있고 그 결과물과 과정을 공유하고 소속원으로서 같은 목표와 계획을 갖고 함께 달려나간다. 힘들 때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몸의 고단함을 그렇게 함께 잊는다. 나를 나누어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이다.
취리히에서 2주, 그리고 산속에서 2주. 고작 2주였는데, 나는 나보다 더 큰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