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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LOG May 25. 2020

[일기] 여행자의 기분으로 아침을 만끽하는 일

싱가포르에서 즐기는 어느 아침 이야기

2020년 4월 4일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작은 메모장과 펜을 드는 일 –

때론 휴대폰 메모장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손으로 기록하는 걸 더 많이 좋아한다.

그리고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본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란 시간은 모든 살아있는 이에게 주어진 24시간과 같은 시간이지만, 어떻게 그 시간들을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하루가 달라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계획한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으면 유난히 더 초조해지거나 슬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행할 때는 다르다


나아가는 발걸음과,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그냥 맡겨버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무던히 느리게 가기도, 그리고 아주 빠르게 가기도 한다. 가만히 해변에 앉아 너울지며 다가왔다, 하얀 거품을 일며 물러서는 파도를 보기도 하며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보기도 한다. 젖어버린 양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내 눈앞에 풍경에만 집중한다. 막연히 보낸 여행에서의 일상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혼자 떠난 나의 첫 여행지는 대학교 2학년 때 다녀온 싱가포르였다. 호주가 본 목적지였지만 스탑오버로 4일간 싱가포르에 머무르게 되었다. 가족과 또는 친구들과 또는 학교에서 단체로, 해외를 온 적은 있었으나, 혼자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을 간다는 게, 여간 큰 걱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도 시골 소녀의 도전은 필요했다.

혼자 다녀온 싱가포르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그러나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자 단숨에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걸, 그러니까 지구 어딘가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살아갈 사람이라는 걸-


싱가포르는 깨끗해서 기분이 참 좋아지는 그런 나라였다. 서울만 한 크기의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커리어를 쌓고, 또 삶을 영위하는 곳-  그곳은 나의 길이 무한히도 넓다는 걸 알려준 첫 번째 나라 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6인실 호스텔에 머물렀는데, 아랍스트리트 쪽에 머물렀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보타닉 가든이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을까 – 나중에 꼭 싱가포르에 온다면, 그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곳의 푸르름을 만끽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를 계기로 나는  30개국 여행 시작했다. 대학생활 전체를 보면, 한국에 있던 시간이 , 해외에 있던 시간이 반인  같다. 감사한 일이지,


그렇게 해외를 돌고 돌아, 나는 싱가포르에 일하러 다시 오게 되었다.

감회가 새롭고 또 감사한 일이다. 돌고 돌아 내가 다시 이곳에 왔구나. 나 참 그동안 잘 견뎌왔구나. 무사히 너의 길을 잘 걷고 걸어왔구나 – 고맙다


그런데 사람이 참 야속하다. 하루를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보내기도, 정말 아쉬운 시간들인데, 새로움에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이 자꾸 감사함을 잊게 만든다. 내가 그랬다. 슬퍼하거나 아쉬워하거나 거만해지거나. 그런 내 자신이 속상해, 나는 어제,  그토록 잠을 설쳤나 보다. 나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

그리곤 그리워졌다. 내가 봤던 그 보타닉 가든이, 그리고 그 맥 리치 저수지가-


여행자의 마음으로, 그때처럼 아침 일찍, 좋아했던 그 길을 다시 걸으면, 초심으로 돌아가 내 하루의 모든 순간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곳이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6시 50분, 트래킹이 가능한 가벼운 옷차림,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냈는데- 한 가지 챙기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일기예보- 지하철에 타자마자 비가 내리는 것이다. 강하게 쏟아져내렸다. 틱-틱- 빗줄기는 강하게 MRT 창문을 내려쳤다. 그때서야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흐림’이란다. Circle라인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렸는데, 도저히 이 날씨엔 그곳에 가기는 무리겠더라. 한참을 승강장 벤치에 앉아 고민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결론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대신 구글맵을 켜서 가까운 카페를 찾는다. 이 근처 15분 거리에 숲 속 카페가 하나 있다 길래 그곳으로 도착지를 설정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105번 버스를 탔다. 버스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는다. 여행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 노래들이 귓속 가득 울려 퍼진다. 다시 창 밖을 바라본다. 비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창문을 통해서나마 내가 느끼고 싶었던 푸르름을 느낄 수 있어 위안을 얻는다. 6 정거장을 지나 내린다. 다시 구글맵을 보니 여기서 5분 거리에 카페가 있다고 나온다. 5분이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그래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이 놈의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며, 비를 뚫고 달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와 옷은 다 젖고, 얼굴에는 송골송골 빗방울이 맺히는데 괜히 신-났다.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길치라는 사실! 이놈의 길치는 결국 그 5분 거리의 카페를 못 찾아 15분을 헤매다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열을 재는데, 체온계에는 Low라는 표시만 반복해서 표시된다. 10번을 시도하고도 같은 결과가 나오니 결국 점원이 “Low is better than High”이라 그러더니 자리로 나를 안내한다. 그런데 실내가 너무 춥다. 옷이 다 젖어서 그런지, 한기가 더 내게 다가온다.


결국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한껏 푸르름이 나의 시야 가득 채워진다. 툭툭 떨어지는 테이블 위의 빗방울을 보니, 나를 채우던 걱정들도 떨어지는 기분이다. 아무렴,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여행자의 기분으로 만끽하기로 했다.


천둥 번개가 친다. 옆에 앉아있는 여성분과 눈이 마주친다. 동그래진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곤, 각자의 동굴 미소를 서로에게 보내주었다. 아무렴 좋다. 모처럼 자유로운 여행자의 기분을 기록해두고 싶었던 나의 잊을 수 없는 어느 아침이었다.


모처럼의 자유로운 여행자의 기분을 기록해두고 싶었던 나의 아침 일기이다. 비가 조금 그치면,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 작업을 이어나가야겠다 –  몸이 젖은 상태로 에어컨 바람을 맞다간 감기가 들지도 모르니-

                                                                                                                          

그날 아침, 멋진 이가 알려준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내립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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