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45
#160 스타벅스 알바생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아침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카우치서핑과 유랑을 뒤적였다. 마침 유랑에서 아비뇽 동행을 구하는 글이 있어서 쪽지를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고,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동행을 구했다.
'제가 가고 싶은 식당이 있어서 그런데 거기 갔다가 밤에 강변으로 나가서 걷는 거 어때요?'
'네, 그럼 예약해두시면 시간 맞춰서 식당 앞으로 갈게요.'
일사천리로 동행을 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도시를 둘러봤다. 아비뇽에는 바티칸처럼 교황청이 있다. 지금도 그런 지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잠시나마 교황이 지냈던 곳이라 도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큰 회색빛 교황청이 중심부에 우뚝 서 있다. 입장료가 있어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보기에도 천장이 높은 건물일 것 같았다.
교황청을 들어가지 않은 대신 강가의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공원으로 꾸며진 이 언덕의 이름은 로쉐 데 돔. 분명 비가 그쳤는데 바람에 빗물이 섞여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산을 폈다. 나도 우산을 바람 방향으로 펴고 공원을 걸었다. 언덕 위에서 본 성 밖 마을과 론 강은 자욱한 비안개가 내리누르는 듯 무겁게 보였다.
청바지가 밑단부터 젖어오기 시작했다. 춥고 몸까지 젖기 시작하자 더 이상 돌아다니기가 힘이 들었다. 기분을 바꾸려고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폰에 저장해둔 영화를 봤다. '올모스트 페이머스(Almost famous)'는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로큰롤 시대를 2시간 동안 체험하게 해 준다. 엘튼 존의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 만큼 좋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식당 앞에서 동행을 기다렸다. 곧 골목 저편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소영이가 다가왔다. 어색한 악수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두 달간 유럽을 여행하려고 휴학을 하고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며 여행 경비를 모았다며 아직 한 달이 남았다고 했다.
"나도 카페 알바 꼭 해보고 싶었는데, 로망 같은 거 있잖아. 스타벅스면 다른가? 재밌었어?"
"음, 재밌으면서 힘들었어. 내가 본 진상 손님 얘기로만 오늘 밤샐 수 있다니까."
그녀가 해주는 진상 손님 에피소드를 들으며 파스타와 송아지 고기 요리를 먹었다. 조막만 한 송아지 고기 토막을 반으로 갈랐다. 가니쉬로 나온 야채도 다 반반씩 나눴다. 프랑스에 온 만큼 저녁을 번듯한 식당에서 한 번 먹어봤는데 내 입맛에는 조금 맹숭맹숭한 맛이었다.
"프랑스에 왔으니까 역시 블랑을 한 번 마셔봐야겠지?"
우리는 밥을 먹고 나와 강변을 조금 걸었다. 아까 식당에서 주문하려던 맥주가 터무니없이 비싸 물만 마셨다. 이곳에서는 식당에서 먹는 음료 가격이 마트 가격의 네다섯 배는 된다. 까르푸에 들어가 각자 마음에 드는 맥주를 골랐다.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던 딸기맛, 살구맛 블랑을 보고 호기심에 집어 들었다. 파란빛이 도는 유리병 색깔이 예뻤다.
"너 여기 다음은 어디로 가?"
"난 이제 스페인 내려가야지. 바르셀로나 갔다가 마드리드, 세비야 찍고 포르투갈까지 갈 계획이야. 오빠는?"
"오 나랑 계획이 비슷해. 나도 여기 며칠 있다가 스페인 갈 거거든. 바르셀로나는 나중에 돈 있을 때 가려고 뺐어. 대신 빌바오 거쳐서 마드리드, 거기서 포르투갈로 넘어가. 우리 잘하면 또 보겠는데?"
"그렇네, 계속 연락하자. 또 보면 재밌겠다."
우리는 맥주병을 비우며 짭짤한 과자를 와작와작 씹었다.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161 스페인으로 가는 길
앞서 적었듯 아비뇽을 오게 된 것은 아를의 반 고흐 때문이다. 비록 기차로 30분 거리지만 계속 내리는 비로 아를에 갈 만한 날을 정할 수가 없었다. 며칠간 또 숙소에 박혀 까르푸에서 산 파스타와 시리얼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먹을 것은 당일에 샀기 때문에 중앙 광장의 까르푸를 단골처럼 드나들었다. 광장에는 회전목마가 있다. 비가 와서 운행은 안 하는 것 같았지만 불도 반짝반짝 빛나며 노래도 나온다면 훨씬 예쁠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재밌게 봤던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의 '러브 미 이프 유 데어(Love me if you dare)'가 떠올랐다. 말랑말랑하던 그때의 나에게 그 영화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영화를 시작으로 프랑스 영화의 팬이 됐고, 아멜리에(Amelie), 베티 블루(Betty Blue), 수면의 과학(The Science Of Sleep) 같은 영화들을 찾아 피엠피에 넣어 다니며 야자 시간에 몰래 보곤 했다. 물론 영화일 뿐이지만, 광기로도 보일 만큼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아비뇽에서는 결국 해를 보지 못했다. 일기 예보를 보고 맑은 이곳의 하늘을 보기는 단념했다. 늦가을 유럽행 비행기표가 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면 생각나는 것은 높은 하늘과 단풍이지만, 이곳의 가을은 음울하게 내려앉은 하늘에 오락가락하는 빗줄기가 먼저 떠오르게 된다.
나는 서둘러 스페인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몽펠리에, 툴루즈 같은 남부의 도시들을 지났다. 각각 하룻밤씩 묵으며 경유지 그 이상의 기대는 없던 곳들이었지만, 몽펠리에는 살아 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 도착해서야 며칠 만에 해를 봤다. 햇빛을 받은 공원과 가로수는 밝고 싱그러웠다. 잘 구획된 길과 현대적 감각의 건물들은 단정한 중산층의 도시 같았다.
툴루즈에서 빌바오까지는 7시간 거리. 위버스 어플로 운임이 싼 시간을 골라 예약을 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 와이파이를 쓰며 웹툰을 최대한 많이 임시저장을 해뒀다. 노래도 좀 듣고 웹툰도 보다 보면 도착해있을 것이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화장실을 안 가더라도 괜히 차에서 내려 다리를 움직이고 기지개를 켰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버스는 30분 정도 간이식당이 딸린 휴게소에서 쉬었다. 식당 메뉴가 너무 비싸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빵이 까슬까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조한 에그 마요 샌드위치였는데, 그마저도 4유로였다.
주차장 한편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얇은 가을 자켓 사이로 바람이 그대로 파고들었다. 빠르게 배를 채우고 버스로 돌아가려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그냥 버스에서 나오지 말걸...' 식당 안을 흘끗 봤더니 기사 아저씨와 조수 모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켓의 깃을 세우고 덜덜 떨며 시계를 1분 간격으로 쳐다봤다. 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피우는 담뱃불이 따뜻해 보여 거기에 몸을 녹이고 싶었다.
버스는 계속 달려 피레네 산맥 자락의 스페인 국경을 넘었다. 버스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둘 톡톡 떨어지는 걸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산을 사자 비를 더 자주 만나는 기분이다. 빌바오에 도착한 건 밤 11시,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는지 도로는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늦은 시간이기 때문에 일부러 터미널에서 가까운 호스텔로 예약을 했다. 8인실 합숙소 분위기의 어두침침한 호스텔인데도 하룻밤에 16유로를 받았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서늘한 방에 다시 들어왔다. 시위라도 하듯 코 고는 소리가 방 안을 떠다녔다. 배가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