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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pr 22. 2020

화창한 바스크의 자존심_빌바오, 스페인

나의 비단길 이야기-46

#162 호스텔을 고를 때 유념해야 할 점


 호스텔의 반지하 방은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났다. 씻고 나가본 공용 거실에는 이미 아침식사 메뉴인 시리얼과 빵이 다 떨어져 있었다. 아직 조식 시간인데, 음식이 떨어지면 그냥 못 먹는가 보다. 미련 없이 짐을 챙겨서 나왔다. 3유로를 더 내고 터미널에서 조금 더 떨어진 새 호스텔을 예약했다. 다행히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있었다. 프랑스는 이미 계속 내리던 비에 낙엽이 다 떨어졌는데, 비교적 따뜻한 이곳은 아직 단풍이 한창이다. 어제저녁부터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걸을 힘이 없어 바로 보이는 슈퍼마켓이 들어갔다. 노란 슬라이스 치즈와 커다란 빵 한 덩어리, 커피우유를 샀다. 가까운 공원으로 가 벤치에 앉아 빵을 뜯어 치즈를 얹어 먹었다. 오늘 세 끼를 책임질 빵과 치즈를 공기가 안 들어가게 다시 돌돌 말아 배낭에 넣었다. 서늘한 날씨 덕에 상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잠깐 걸었지만 빌바오는 깔끔한 인상의 도시였다. 가로수와 공원의 배치뿐 아니라 평범한 빌딩들도 건축에 공을 들인 느낌이다. 깔끔하게 구획된 블록끼리 통일감마저 느껴져 마치 커다란 고급 아파트 단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을 찾아본 바로는 빌바오는 성공적인 도시재생 모델로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20세기 이 도시는 스페인 북부 석탄, 철광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90년대 말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강변을 정리하고 녹지를 확보하는 등 도시재생에 노력을 기울여 성공적으로 문화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호스텔을 고를 때는 가급적 작은 규모의 호스텔을 고르는 편이다. 방은 가격대만 내 예산에 맞다면 4-6인실이 가장 좋고, 8인실부터는 번잡해지기 시작한다. 작은 호스텔은 가정집을 개조한 분위기가 나는 곳이 많은데, 이런 곳은 자연스럽게 투숙객끼리 친근하게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반면 프런트를 보는 직원만 대여섯 명에, 객실이 두 자릿수가 넘어가는 큰 규모의 호스텔은 떠들썩한 단체 손님이 올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공용 공간에서 친근하게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잘 안 만들어진다.

 하지만 빌바오에서는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많이 없었다. 새로 예약한 곳은 포스텔 빌바오(Poshtel Bilbao), 입구부터 사람들이 가득 찬 왁자지껄한 곳이었다. 친근한 주인아저씨보다는 하얀 셔츠를 맞춰 입은 직원들이 여행객들을 맞아주었고, 건네받은 카드키 하나로 방문, 락커, 화장실, 샤워실까지 이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방금 세탁한 듯한 하얀 시트 냄새가 방문을 열자마자 날 만큼 깨끗한 곳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곳은 인간적인 살가움이 없는 것 같아 재미가 없다. 12인실로 체크인을 했고, 다들 이미 나갔는지 방은 텅 비어있었다.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길을 걸으며 바스크 깃발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 곳은 지역적 특색이 굉장히 강하고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쓰는 언어인 바스크어 또한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속한 로망스 어군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그 기원에 대해서도 설이 많다. 그런 지역답게 여전히 분리 독립 요구가 거센 곳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의 일부인 축구팀 아틀레틱 빌바오 또한 바스크 지방 출신만 선수로 뛸 수 있는 이른바 순혈주의를 -지금은 기준을 꽤 완화했지만- 고집하면서도 수준 높은 스페인 프로축구 1부 리그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로 꾸려진 축구팀답게 빌바오 사람들은 유별난 팬심을 가진 것 같았다. 아틀레틱 클럽의 로고가 붙은 상품은 시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었다. 셔츠나 머플러, 기념품 같은 일반적인 굿즈뿐 아니라 슈퍼마켓의 우유, 소시지 같은 식료품에도 축구팀의 엠블럼이 자랑스레 걸려있었다.



#163 자코메티와 현대미술


 '빌바오랑 바르셀로나 중 고민인데, 어디가 좋을 것 같아?'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난 빌바오. 바르셀로나는 너무 관광지 같아서 별로더라.'

 프랑스에서 다음 여정을 정하기 전 스페인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만으로도 가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의 말에 따라 미술관으로 향했다. 철판을 덧댄 파도 같은 외관 탓에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문처럼 특이한 건물이었다. 곡선으로 처리된 벽과 유리, 철, 콘크리트 재질의 외벽 때문에 초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휘어진 벽이 내부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매표소 앞에서 집어 든 리플릿에는 상설전시에 대한 소개 외에도 특별 전시로 인상파와 자코메티의 전시를 소개해두었다. 국제학생증을 보여주고 9유로에 티켓을 끊었다.



 구불구불한 외관을 그대로 반영한 듯 내부 또한 천장이나 벽이 물결쳤다. 벽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공간 감각이 흐려지는 기분이다. 어떤 전시보다도 미술관 자체가 가장 큰 전시물인 곳이다. 사실 전시 자체를 기대하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현대미술은 어렵다'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한 무더기의 전화기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작품은 시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자코메티 전시관에서 본 그의 깡마르고 차가운 조각들도 백 년 전에는 굉장히 혁신적이었겠지만, 현대미술 특별 전시관을 나와 둘러본 그의 조각들에서는 고전적인 조형미 비슷한 것까지 느껴졌다.  



 미술관 뒤뜰로 나오면 강변과 맞닿은 작은 산책로가 나온다. 이곳의 또 다른 상징인 거미 동상을 비롯한 설치 미술 작품들이 늘어서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쇼핑센터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많이 걷게 된다. 바깥바람을 쐬자 갑자기 다리가 아파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 건너에는 빨간 단풍나무들 때문에 가을 분위기가 났다. 비록 하늘 한편에 여전히 먹구름이 떠있기는 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깊고 푸르렀다. 오랜만에 내가 생각하는 가을 날씨다. 친구들 생각이 나 여기저기 보이스톡을 돌렸다. 혼자 여행을 하지만 이곳처럼 철저하게 혼자 다녔던 곳은 몇 군데 없었다. 말이 많아 옆에서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외로움을 쉽게 타 같이 있어줄 사람이 필요한 성격상 혼자 다니는 여행에는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절대 적응하지 못할 같다.  



#164 텔레토비 동산


 

 리들에서 원 플러스 원 묶음으로 데스페라도스를 샀다. 캔 묶음을 달랑달랑 들고 다니며 술을 마실 만한 포인트를 찾았다. 스페인은 공공장소에서 음주가 불법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검은 비닐봉지로 캔을 감쌌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알렉스와 미셸은 보수 중인 다리에서 노숙을 하는 주제에 술을 마실 때만큼은 법을 지키는지 신문지로 병을 감싸고 마신다.

 노란 낙엽수가 늘어선 강변 산책로를 지나 그럴듯한 공원을 발견했다. 텔레토비 동산 같이 생긴 언덕을 올라가면 잘 가꿔진 공원이 나온다. 지도를 켜서 확인한 공원 이름은 에체바리아(Etxebarria), 할아버지들이 잔디 위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며 스윙 연습을 하고 계셨다.   


 

 공원에 앉아 비닐봉지로 싼 맥주를 마시며 어제 먹다 남은 빵과 치즈를 마저 먹었다. 동행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잘 챙겨 먹고 다니지만, 원래 먹는 것에 크게 지출을 하지 않는 편이라 혼자 다니다 보면 끼니를 빵으로 때우는 날이 많다. 이런 날이면 항상 마음속으로 '배만 부르면 다 똑같다'라고 되뇌곤 한다. 그래도 5대 영양소는 골고루 먹어줘야 하기 때문에 호스텔 조식으로 나온 귤을 몇 개 챙겨 나와 입가심을 했다.

 할아버지처럼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데 서서히 먼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구름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하지만 먹구름은 흰 구름보다 훨씬 빨리 움직인다. 이내 하늘은 낮게 깔리며 어두워졌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 밑에서 비를 긋다가 갑자기 우동이 먹고 싶어 졌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 찾아간 우동집은 닫혀있었다. 스페인의 브레이크 타임은 늦고 길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곳이 아니라면 보통 4시에서 8시까지 식당이나 카페는 문을 닫는다. 나는 우동을 꼭 먹어야 했기 때문에 호스텔로 돌아와 알람을 맞춰두고 잠을 잤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그 가게에 다시 찾아갔다. 비는 그쳤다. 브레이크 타임이 스페인 사람들에게 맞췄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이곳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는다. 저녁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길거리는 조금 붐볐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다 8시 정각에 칼같이 맞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저녁 타임 1등이다. 종업원은 나를 혼자 사람들을 위한, 창문을 마주하는 자리로 안내해줬다. 창밖으로 삼삼오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따끈한 우동을 후루룩후루룩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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