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내키지 않는 것이 있는
떨떠름하다 | 형용사
(3)【…이】 마음이 내키지 않는 데가 있다.
그곳에 가도 된다고 허락은 했지만 왠지 기분이 떨떠름하다.
그의 말에 나는 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출처: 우리말샘)
며칠 전에 추석이 있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다들 어떤 기분이 들까? 마냥 어릴 적에는 오랜만에 할머니도 보고, 사촌동생들도 본다는 생각에 추석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는 송편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고, 마당의 강아지도 귀여웠고, 밤하늘의 별도 좋아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시골 가는 것을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았다. 길 막혀서 불편한 자세로 몇 시간씩 내려가는 것이 싫었고, 전 부치고 송편 만드는 일이 귀찮고 힘들었다. 그래서 문제집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골에 내려갔다. 일단 공부한다 그러면 아무도 안 건드니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하기 싫은 일을 안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아빠가 고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나는 성인 되고 나서는 명절에 대해서 약간의 양가감정이 있는 것 같다. 휴일이고, 오랜만에 친척들 보니 반가운 긍정적인 마음과 함께, 길 막히고, 명절 준비하는 게 싫은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동시에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번에는 부정적인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왠지 올해는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여러 매체에서 '가장 듣기 싫은 명절 잔소리 Top N'을 조사해서 발표하고, 요즘은 '잔소리 메뉴판'이라면서, 용돈이나 주면서 잔소리를 하라는 밈도 많이 보인다 (그림 1). 그런 잔소리 목록을 보다 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아, 딱 내 나이다.' 20대 중후반, 대학은 졸업했다. 취업 잔소리, 회사 잔소리, 결혼 잔소리를 듣기에 딱 좋은 나이. 심지어 외모 지적도 받기 좋다. 대학생 때는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니~'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떤 짓을 해도 용서될 수 있지만 이제는 '외모가 그러면 OO할 수 있겠니~'라는 소리를 듣는 시기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훌륭하게도 모든 사촌들 근황이 '그래~ 지금 상황이 안 좋지... 다 안 좋아'로 퉁쳐지고, 날씨가 너무 덥다는 수다로 넘어갔다. 즐겁게 대화에 껴서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한 당숙께서 나에게 말을 했다. "얘 너 살 좀 붙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보통... 할머니가 보기 좋다, 살쪘다고 하면 눈에 띄게 살이 찐 거라던데? (참고로 나에게 말을 건 당숙은 촌수로는 할머니가 아니지만 사회적 기준에 따라 노인인구에 속하신다.) 물론 실제로 체중이 좀 늘기는 했다. 그렇지만 BMI 기준으로 정상범위이다. 혹시 전날 잠을 잘 못 자서 부은 것을 착각하신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이어지는 말, "목련꽃 같으니 이쁘다."
자. 이 브런치북의 서론에도 썼지만, 난 MBTI가 T이고 이과다. 목련 같다는 표현은 대체 무엇일까? 일단 칭찬 같기는 하다. '이쁘다'라는 말이 들어갔으니까. 목련도 엄청 예쁜 꽃이니까. 그런데... 그렇지만... 자꾸 '살이 붙었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저번 설에도 봤는데, 설마 7개월만에 눈에 띄게 찐 건가. 겨울 바지 산 지 몇 년 안 되었는데, 이러다 안 들어가는 것 아닐까? 아냐, 그렇지만 나는 지금 정상 체중이잖아. 정상 범위에서 살이 붙은 건 안 좋은 것은 아니지 않나? 왠지 칭찬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감정이 애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떠름하다. 이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뭐라 설명하기엔 길어지고, 쪼잔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마음이 내키지 않는 데가 있다. 추석이 오는 것 자체도 떨떠름했다. 당숙의 칭찬도 떨떠름했다. 이는 별로 마음에 드는 감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떨떠름할 때 약간 죄책감 같은 것이 들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이 내키지 않으면 자기합리화를 좀 하겠는데, 이유 없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로 마음이 안 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추석이 떨떠름한 이유는 휴일에 그냥 온전히 쉬고 싶고 귀찮은 것을 감내하기 싫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기인해서 죄책감이 든다. 당숙의 칭찬이 떨떠름한 이유는 이 사회가 건강 체중이 아니라 마른 것을 선호하는 경향성에서 기인한 것 같고,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감정이 드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든다.
어찌되었든, 참 떨떠름한 명절이었다. 왠지 올해 뿐 아니라 앞으로의 명절도 떨떠름한 감정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좀... 덜 떨떠름했으면 좋겠다.
cf. 부천 역곡동 재개발 구역에 거대한 목련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진짜 예뻤다. 만개했을 때 보면 마치 알전구가 와글와글 모여있는 느낌이다. 지금쯤이면 베어졌을까...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