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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Oct 02. 2024

[감정일기] 아련한 대추와의 추억

아렴풋한 기억들

아련하다 | 형용사

(1)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아렴풋하다.

    아련한 생각.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  

아렴풋하다 | 부사

(1)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또렷하지 아니하고 흐릿하게.

    오랜 추억들이 아렴풋이 떠오르다.  

(출처: 우리말샘)


재택근무를 하다보면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실외기를 설치하는 소리, 배달 오토바이가 왔다갔다 하는 소리, 이사하는 소리, 재활용 차가 왔다갔다 하는 소리, 아이들의 하교 소리 등. 생각보다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소리가 들리냐에 따라 무슨 요일인지, 몇 시 정도인지 예측할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오전에 산책을 하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있다. 가끔 듣다 보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단지 내 식재되어 있는 여러 식물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 몇 달 전, 대추가 처음 열리기 시작할 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추나무에 대추가 열렸어요!" 그러자 한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주세요" (정확하게 작성하자면 '따주떼여'정도의 발음이었다.) 당황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곧이어 대답했다. "아직 아기 대추라서 안 돼요~" 그러고 이번 주, 목소리를 듣자 하니 동일한 어린이집이 또 우리 아파트 앞의 대추나무를 지나가는 듯 하였다. "대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어요!" 그러자 아마도 동일한 꼬마 아이로 추정되는 목소리. "달아요?" (이번에는 발음이 꽤 정확했다. 물론 '달아요'자체에 어려운 발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듣고 싶었는데 다른 아이가 "대추가~ 엄청엄청~ 많이 열렸어요!"라면서 대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몇 달에 걸친 대화를 들으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따주세요"라고 말하더니만, 이제는 소유욕(?)이 많이 줄어들었구나... 선생님과 티키타카가 될 수 있는 질문도 하고... 많이 컸네... 묘하게 내가 키운 아이도 아니지만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그 아이들의 나이 즈음에 있었던 대추나무에 대한 기억이 막 떠올랐다. 

대추 사진. 2010년 추석.

나는 우리 아파트 단지의 대추나무 말고, 시골에 있는 대추나무 추억이 있다. 친할머니가 살고 있는 시골집 앞에는 차도 옆에 덮개 없는 도랑이 있고, 반대편은 흙이 언덕처럼 쌓여있고 그곳에 감나무대추나무가 있다. 언덕 쪽에서 접근해서 닿을 수 있는 나무는 감나무이고, 대추나무가 심긴 곳은 경사가 심해 접근이 어려웠다. 그래서 대추를 따려면 차도에서 몸을 쭉 늘려서 닿을 수 있는 가지에 있는 것만 딸 수 있었다. 어릴 때는 키가 작아서 팔을 뻗다가 균형을 잃고 도랑에 빠질까봐 대추 따는 것이 무서웠었다

명절이 되면 차례를 지내기 전에 어른들이 대추를 따서 상에 올렸다. 아주 어릴 적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차례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게 된 이후 의문이 들었다. 붉은 과일동쪽에, 흰색 과일서쪽에 놓으라면서 대추를 제일 왼쪽에 두라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때까지 봐 왔던 대추나무의 대추는 초록색이었는데? 흰색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니, 익으면 빨갛게 된다고 그랬다. 그렇다, 생각보다 추석은 대추가 익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시골집 대추는 아직 덜 익었는데 마트에는 붉은 대추를 잘만 파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 기억이 있길래 나중에 삼계탕을 먹으면서 빨갛고 쪼글쪼글한 무언가가 대추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이 놀랐었다. 한 번 씹어먹어 보았는데, 식감도 이상하고 맛도 별로 없었다. 차라리 초록대추가 맛있는데, 혹은 다 익은 생대추도 맛있는데, 왜 이렇게 쪼글쪼글하게 말려서 먹는지 너무 충격이었다. (사실 지금도 생대추를 더 좋아하므로, 대추를 왜 말리는지 아직 잘 이해는 안 간다.) 

또 정말 잡생각이긴 하지만, 어디 관광지에서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을 팔길래 시골 대추나무가 벼락에 맞으면 이득인가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던 적도 있다. (대추나무야 미안해... 너무 속물같지...? 근데 그런 생각을 잠깐 할 수는 있잖아... 그냥 궁금했던거야 진짜 벼락을 맞길 바란 건 아니고!) 물론 옆에 있는 감나무가 키가 훨씬 크기 때문에 벼락이 내리친다면 감나무로 내리칠 것 같다. (감나무야 너에게도 미안해... 그냥 과학적으로 너가 벼락 맞을 확률이 대추나무보다 크다는 이야기야... 진짜 벼락맞길 바라는 게 아니라구우...)


아직 옛 추억을 되새기며 살기에는 젊은 나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이렇게 옛 기억이 떠오를 때면 기분이 참 묘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의 분위기나 감정이 몽글몽글하면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을 아련하다, 아렴풋하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아련하다,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아렴풋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렴풋하다,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또렷하지 아니하고 흐릿하게'라는 뜻이라고 한다. 뭔가 선명했다면 막 아름다운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 흐릿하기 때문에 뭔가 더 좋은 기억처럼 남는 것 같다. 마치 화질은 포기하고 필터를 껴서 감각적인 사진을 찍는 것처럼...

참 아련한 대추나무와의 추억이고, 앞으로 더더욱 아련해지겠지.


p.s. 올해, 시골의 대추나무가 빗자루병이 걸렸다. 대추나무의 빗자루병은 꽃눈이 잎으로 변하는 질환이다. 따라서 이제 대추 꽃도 안 피고, 열매도 맺지 않는다. 또한 해당 병은 궁극적으로 나무가 고사하게 만드므로 미리 베어주게 될 것 같다. 대추나무야 나무별로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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