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실직한 지 두 달 즈음되자 놀라서 버둥거렸던 일상들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이 사실을 아직 모르고 계시는 양가 부모님들께 알릴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설 명절이 지나고 그다음 주에 시댁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다.
당신 아들이라면 하늘에서 구름 타고 내려온 존재 이상으로 생각하시던 시어머니께서는 얼굴이 사색이 되셨다. 참고로 어머니는 호랑이도 울고 갈 여장부 스타일이시다.
"아니 어떤 눔들이 내 아들을 나가라 했다더냐? 우리 천사 같은 아들을!
그놈들번호 대라! 이놈들 가만히 못 있지 내가!!"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회사로 찾아가실기세셨지만 이내 풀이 죽으셔서
"내가 통~요새 절에 불공드리는 걸 못했어.... 다 내 정성이 부족했지...
에미 네가 힘들더라도 애 밥 좀 잘 챙겨 먹여라. 힘들수록 사람이 밥을 든든히 먹어야 되는 법이다" 하셨다.
"어머니!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요새 얼마나 잘해 먹이는지 모르실걸요?"
나는 쌩긋 웃으며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내 미소를 보시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웃으시며
"아이구~~ 이 철부지야~"하고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국적불명이었던감자탕과 돼지등뼈가 문득 떠올랐지만 빛의 속도로확 지워버렸다.
친정집에도 말씀을 안 드릴 수는 없었다. 친정엄마는 사위도 걱정이었지만 아무래도 막내딸인 내가 더 걱정이 되셨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셨다. 그러시고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더 있겠나"하셨다. 우리 친정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다. 유일하게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다.
종교가 남편 집안과 달라 사실 결혼도 못할뻔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닥치니 왠지 다행이다 싶었다.
부처님 예수님 다 도와주실 것 아닌가? 시어머니의 공식 종교는 불교지만 점집도 잘 다니시기 때문에 단골 점집 산신령님도 추가 멤버다.
마음이 든든했다. 뭐가 걱정인가?
엄마가 챙겨주신 성경책과 시어머니가 주신 염주
부처님 예수님 꼭 합격시켜주세요~
시댁에서 집으로 가려하는데 시어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돈을 꺼내 나에게 쥐어주셨다. 고기를 먹어야 기운이 나니까 고기를 자주 먹이라고 하셨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을 자주 사주셨다. 내가 생선을 잘 먹지 않아서 평소 생선은 안 챙기시더니 사위 생각에 각종 생선을 집으로 보내주셨다.
그럴 때마다 한겨울 길가 노점에서 어묵 국물을 마신 거처럼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졌다.
그 어묵 국물에서 가끔 후추 맛이 느껴질 때처럼 알싸하게 찡했다.
친정아버지와시어머니는고인이 되셨다.
가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코스모스 꽃을 보거나 시어머니가 즐겨 드시던 순댓국을 먹을 때면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그러면 두 분의 얼굴이, 웃고 있는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법이다.
살면서 백척간두에 서있는 것 같을 때 너무 힘이 들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떠본다.그때마다 보이는 부모님들의 얼굴에 나는 힘을 냈고 위로를 받았고마침내 평화를얻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