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신호가 나타나면 돔황챠

끝이 안 좋은 관계에는 늘 통제시그널이 있었다

by 해센스

사귀기 전부터 한 이주일정도 그가 내게 매일 전화를 했는데 첫마디가 “어디야?”였다. 반말을 하기 전에는 “어디에요?”였으려나. 그 “어디야?”라는 말이 어느샌가부터 다정하게 느껴지기 전까지 그 말이 불편했다. 아직 무슨 사이도 아닌데, 어디야라고? 어딘지를 왜 묻는 거지? 오래 만났던 전여자친구와 굳어졌던 습관을 나에게 그대로 이어서 하는 건가 싶었다. “지금 통화 가능해요?”도 아니고, 왜 어딘지를 다짜고짜 묻는 건지 묘하게 통제받는 듯한 느낌에 처음부터 불편했다.


영어스터디를 하면서 친해졌던 스터디 멤버들과 평일 밤 10시에 스터디를 마치고 같이 대화를 나누며 동네를 걷다가 조금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데 어디냐며 전화가 왔다. 사귀기 전이었다. 12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고, 잘못한 것도 하나도 없는데 늦은 시간에 밖에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썸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이일 때,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서 미리 이야기를 하고 저녁에 밥 먹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끝났다고 하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그 사람과만 잠재적 연인관계를 염두에 두고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때는 잘되고 싶었으니까 싫지는 않았다. 잠깐 나와서 전화를 받았고 내가 신경 쓰이냐는 식으로 툭 던져봤는데 굉장히 매끄럽게 넘어갔다. 연락도 중간에 해줘야 친구들한테 “우리 오빠가 연락했네. ”하면서 얘기할 수 있다며, 너무 또 신경 안 쓰면 그것도 서운하다며 재밌게 이야기해서 기분 좋게 짧은 통화를 마무리했다.


사귀고 나서 다른 독서모임이 끝나고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사람들과 가볍게 저녁식사를 한다고 메시지를 했는데, 바로 전화가 왔다. 자취하니까 난 보통 일정 끝나고 사람들하고 밥 같이 먹을 수 있으면 먹는다고 전에 이야기했었다. 그날 뭔가가 이상하다고 나한테 이야기했는데, 화내거나 일하는 시간이 아닐 때 밤까지 몇 시간 동안 연락 두절되지 않으면, 연인의 이런 조금 평균범주를 넘어선 행동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라 그냥 신경 쓰이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전연애에서 헤어졌던 이유나 나를 대할 때의 느낌으로 조금 통제 성향이 있다는 것은 느꼈다. 그런데 나는 예측가능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밖에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는 것을 싫어하고, 가끔 술을 마신다면 꽤나 주량도 센 데다가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지 않는 이상 술 마시고 연락이 끊길 일도 없어서 이런 것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도 충분히 생각가능한 부분이었다. 저녁에 전화를 하면 어디야라고 습관처럼 묻고, 약속 중간에 전화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과도하게 집착한다고 느껴지지 않게 매우 조심해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끊는 정도여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의 어떤 집요함은 다른 부분에서였는데, 그 부분이 불편해서 마음이 계속 안 좋았고 그것이 헤어짐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나 역시도 그에게 통제를 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 역시 싸움으로 만들지 않고 무리 없이 수용했다. 예를 들면, 회식을 하면 밥 먹고 술까지는 마셔도 여자와 함께 노래방이나 영화관 등 갇힌 곳에 가지 말라는 요구를 했는데 왜 간섭하고 통제하냐는 말 없이 일단 말로는 알았다고 했다. 나의 다른 사소한 요구들에 그가 완강히 거부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특정 부분의 집착도 계속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면 나도 그의 요구를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결국에는 내가 맞춰주는 만큼 그가 내 바운더리를 존중한다거나 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과하다고 느껴지는 그의 요구를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잘 헤어졌고 더 길어지기 전에 이성과 직관에 따라 고민해 보고 헤어지는 결정을 한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어지고 보니 그의 작은 변명들의 실체가 보였고, 언제나 미리 짜둔 그의 완벽한 대답에 너무나도 쉽게 수긍했던 내가 그에게는 관대했고, 스스로에게는 나노 단위로 정밀하고 엄격했구나라는 자각이 들었다.


찝찝한 뒤끝을 남길지언정 그 순간에는 웃어넘길 수밖에 없게 하는 유머와 내가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만큼의 딱 적정선으로 포장해 둔 그의 통제와 지배 성향은 다분했던 나르시시스트 기질의 가장 발견하기 쉬운 표식이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매번 ‘나한테 이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 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를 돌이켜보면 나는 한 때 그의 부풀려진 이고(ego)를 완벽히 채워주는 조종하기 쉬운 연인이었던 것 같다.


헤어지고 일주일 후 그의 마지막 작은 거짓말을 듣고 언제나처럼 수용했고, 내 탓이라고 했다. 물론 사랑 앞에서 내 탓도 있다.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고 사랑해주지 못해서, 그래서 안정감 속에서 그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런데 많은 순간 내 직관이 다른 것을 말했고, 늘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자존감이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가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갈등이 있을 때 제대로 된 방식의 의사소통으로 해결이 된 적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보통 이성적 판단으로 이별을 결정하고 이별 후에도 남은 사랑과 미안함을 혼자 곱씹는 편이다. 그런데 나르 기질의 연인이 남기는 것은 분노와 우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그의 내면을 과연 사랑해 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나에게 남긴 것을 단 하나의 단어로 말하자면 의심이 아닐까. 사람에 대한 의심.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믿고 내 모든 것을 편안하게 공개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나르시시스트의 언어와 행동 패턴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서른 살이 넘어서 가까운 곳에 두어버린 나르시시스트는 나를 평생 괴롭힌 내 인생의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한, 평생 나를 눌러온 비난과 레이블링, 가스라이팅의 기억과 아픔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되살아났다. 그와의 이별 후 나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자책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선명해졌다. 나르시시스트가 어떻게 한 사람의 자존감과 인생을 망가뜨리는지. 하지만 나는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글을 쓰고 곰곰이 생각하고 내 자아와 자존감을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게 있던 타인에 대한 통제 성향을 흘려보내려고 한다. 나는 절대 나르시시스트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를 내 인생에 다시 끌어당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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