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잠만 잘자더라 (밥도 잘 먹더라)

예민한 사람에게 연애가 미치는 영향

by 해센스

동일 용량(아토목세틴 18mg, 세로토닌 재흡수억제계열 항우울제 5mg)으로 약을 먹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부작용이 체감할 수 있게 줄었다. 며칠 전부터는 잠도 잘 자고 약 먹고 속이 부대끼는 것도 확연히 줄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약을 처방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원래 만나던 선생님을 못 만났다. 그래서 별다른 이야기는 못 나누고 다른 선생님께 동일 용량으로 똑같이 처방받았다. 지난주를 기점으로 근 일주일 정도는 우울감을 느끼지 않아서 항우울제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약을 안 먹은 날의 반응을 관찰해 보니 약이 필요할 것 같다.


9월 26일 이후로 3일을 약을 안 먹었다. 술을 마셨거나 다음날 음주 가능성이 있을 때, 하루는 연이어 잠을 못 자고 몸이 안 좋아서 일부러 약을 안 먹었다. 약을 안 먹으면 조금 더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가장 최근에는 3일 전에 약을 안 먹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이틀 전 우울감이 들었다. 이유는 짧은 연애 중 쌓인 스트레스, 이별 후의 스트레스, 그리고 어제 느낀 직장에서의 약간 비인간적인 대우였다. 우울한 책을 읽으니 좀 더 우울감에 잠기긴 했지만 책은 오히려 현실세계의 사람들과는 쉽게 나누기 어려운 감정적 공감을 주고 근본적으로는 우울감을 건강하게 겪어낼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


그날 저녁때 초밥뷔페에 가서 초밥과 샐러드, 디저트를 배불리 먹고 웃긴 친구와 웃긴 이야기를 하면서 공원을 산책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우울감에는 역시 배불리 먹고 걷는 것이 최고의 처방이다. 그제는 우울감과 불안감에 조금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약을 먹고 잠든 어제는 불안하지도 우울하지도 안절부절못하지도 않았다. 약이 정서 안정에 체감할만한 도움을 주고는 있다.


그렇다고 약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대단히 충동적이라거나 평소와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떤 트리거가 있거나 생리 주기에 따라서 조금 더 우울에 취약하고, 불편한 상황이나 장소에 있을 때 약간 더 불안하고, 스트레스에 조금 더 취약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럴 때 생기는 일은 일단 불편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대피시키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만약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감당할 수 있는 시간보다 오래 노출된다면 멜트다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잠을 한 달 반 정도 잘 못 자다가 이별하고 나서는 잘 잤다. 짧은 연애였고, 이별이더라도 어떤 결정이 내려졌으니까 푹 잠이 잘 왔다. 연애는 힘들다. 행복한 만큼 힘들다. 바운더리를 침범받는 것을 싫어하는데 공간적 바운더리만큼 시간적 바운더리도 쉽게 침범받는 것이 정신적으로 힘들다. 신경이 쓰이니까 잠을 잘 못 잤다. 이른 아침과 새벽에 메시지가 오니까 잠깐 깨서 확인하게 되면 좋은 내용이더라도 뇌에 잔상이 남아 잠을 잘 못 잤다.


내가 상대방에게 서운함과 불만족을 느낄 때나 상대방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때나 예민하고 불안한 뇌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예민해서 잠을 잘 못 자고 잠을 잘 못 자니 더 예민해지고 그러면 또 잠을 잘 못 자고 악순환이었다. 저녁에 약을 복용하면 뇌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자극감이 들어 수면을 방해했다.


그런데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니, 씁쓸하게도 그것이 싱글이 된 것이라도 어쨌든 예민함이 줄어들어 잠을 푹 자게 되었다. 오후에 카페인 섭취를 줄인 영향과 몸이 약에 적응한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서적으로 편안해진 것도 한몫하긴 한다. 사랑받고 표현받으면 물론 행복하지만, 언어적인 표현이든 스킨십이든 그것들도 자극(stimuli)이고 과도한 자극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강아지들은 갑자기 달려들어서 멀리서만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연애를 할 때도 오히려 내가 때로 강아지 같은 연인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상대방이 과하게 치대면 힘들다.


예민한 사람은 빛이든 소리이든 촉감이든 자극이 낮아야 한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잠은 잘 못 자도 밥이라도 거의 항상 잘 먹어서 축복이고 다행이다. 만약 연애를 한다면 수면제까지 복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keyword
이전 19화2주 만에 약을 하루 스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