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청이 유행하는 23 S/S 시즌의 어느 봄날
회사 선배가 “비 오는 날 좋아하죠?”라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무섭다고 했다.
왜냐면 부대찌개집에서 킬바사 부대찌개를 주문해 먹고 있는데 선배가 킬바사 소시지를 잘게 자르고 싶은데 잘게 안 잘라진다고 했다. 그는 내 브런치를 모르고 구독자가 아니다.
음식을 잘게 먹는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소시지를 잘게 잘라주려고 해서 놀랐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도 맞추고 음식을 잘게 먹는 것도 맞춰서 놀랐다. 소시지를 잘게 자르려고 한 건 보통 여성분들이 조그맣게 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 옷을 평소보다 신나게 입어서라고 한다.
청청패션에 귀욤뽀짝한 지비츠를 잔뜩 붙인 흰색 플랫폼 크록스를 신었다. 귀엽고 힙하고 클래식한 액세서리들도 장착했다.
올봄 청청패션 유행이 너무 좋아 봄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슬부슬 봄비가 오는 날도 많았으면 좋겠다. 산책을 하지 못해도 오히려 좋다.
사무실에서 고요하게 빗소리를 듣는 데 너무 좋다. 창문이 등 뒤와 오른쪽에 있어 입체적으로 빗소리가 들린다. 빗물이 창문에 떨어지는 소리, 차가 빗물에 젖은 도로를 스~하고 지나가는 소리가 좋다.
축 가라앉은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가 좋다.
갑자기 다른 부서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점심시간에는 사무실에서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 국룰이다. 특히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조용히 앉아 자리에서 바닐라라떼를 마시며 빗소리만 들어도 충분하고 충만하다.
비 오는 날의 점심 휴게시간만큼은 이어폰을 빼고 빗소리를 듣고 싶은데 사람의 소리가 새어들어 고요함을 깼다.
모두가 순간의 고요를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사람의 말소리를 피해 밖이 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빗방울이 도로바닥에 떨어져 동그라미를 만들어내고 다시 튀어 오르는 장면을 본다. 비가 만들어내는 모양들이 좋다. 땅에 만드는 모양도, 창문에 만드는 모양도 좋다.
비 오는 날의 공기와 냄새, 색상이 좋다. 습한 공기, 흙냄새, 나뭇잎과 거리의 모든 것들의 색상이 조금씩 진해진 것이 좋다.
어제 주문한 소화가 잘되는 우유에 액상 콜드브루 조합, 오늘 아침 불타기 한 주식의 장대양봉, 점심시간에 엘리베이터 옆 벽에 얼굴을 대고 있는 부장님의 귀여움, 어제 보던 드라마를 점심시간에도 보고 싶어서 식사가 나오기 전에도 드라마를 보려고 하는 그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 소시지를 잘게 잘라주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을 알아맞힌 선배, 사람 소리를 피해 내려간 곳에서 본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모양들.
비 오는 날의 오전은 완벽했다.
오후에는 윤하의 노래를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