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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쓰지 않은 나

습한 날은 진지한 가면을 흘러내리게 해

by 해센스

나의 가면을 벗은 모습은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집에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 혼자 탄다면 그때부터 더 진짜 내가 나온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부턴 가면을 거의 벗어 던진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진짜 내 모습 그대로가 된다. 나를 지치게 하는 사회적 상호 작용이 없었던 날이라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신나는 나 자체가 된다.


밖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신남을 맘껏 드러낸다.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러 먹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사서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것들을 먹을 생각에 마냥 신난다.


그리고 밖에서 억눌렀던 신남을 드디어 몸으로 표현한다. 아이들이 신날 때 몸으로 표현하는 그런 신남을 드디어 표현할 수 있다. 팔꿈치를 구부린 채 양팔과 손을 맘껏 좌우로 흔들어 신나는 기분을 표현할 수 있다.


밖에서도 기분이 좋으면 신나게 걷고 싶고 팔을 자유롭게 흔들고 싶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춤추면서 걸어 다닐 수는 없다. 그런 조금씩의 절제가 약간 답답하고 진지한 어른들의 세상이 너무 많이 지루하다.


혼자 공원에 가서 걸을 땐 기분이 좋으면 조금 신나게 걸을 수 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공원에서는 자유롭다. 그래서 공원이 좋다.


자연을 보면 신나고, 그곳에서는 조금이라도 신남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보통 사람보다 크게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늘 절제해야 한다. 울고 싶을 땐 화장실이나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운다. 신날 땐 그냥 마음속으로 신나 하는 게 다다.


조금 밝아지고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들한테 말을 먼저 붙이는 정도의 차이가 난다. 사람들은 표정이 확연히 밝다고 차이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런 꾸리꾸리한 습한 날에 왠지 모르게 신난다. 이 날씨가 날 왜 신나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신난다. 햇볕에 조금 약한 것 같다. 실제로 햇볕에 약하다.


여름엔 밖에 조금만 서있어도 금세 지친다. 강한 자외선 알레르기 같은 것이 있다. 한여름에 베트남에 여행 갔다가 발등에 두드러기가 생겨서 병원을 찾았고 실제로 햇볕 알레르기를 진단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강하게 비추지 않는 날엔 더 신나는 것 같다. 나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것이 없는 느낌이다.


햇살을 받는 것도 분명 좋아하고 기온이 오르기 전 공허할 땐 햇살을 일부러 쬐기도 했는데, 내가 진짜 신나는 날은 흐리고 비가 조금씩 오는 날이다.


11월에 북유럽 국가에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해가 너무 짧고 하늘은 늘 회색이라 같이 갔던 동료들이 우울해진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을 당연히 좋아하지만 회색 하늘 밑에 있어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처지진 않았다. 덴마크가 가봤던 곳 중 제일 좋아하는 나라인 걸 보면 겨울의 덴마크도 나에겐 괜찮았던 것 같다.


하늘이 파란 시간이 짧으면 짧은 순간의 파란 하늘을 마음껏 누리면 된다. 그리고 하늘이 회색일 땐 편안하게 눈을 뜨고 세상을 구경하면 된다. 비 오고 난 후의 촉촉한 공기를 마시며 같이 기분이 좋아진 나무들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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