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당근김치 이야기, 고려인 이야기 없이
마르코프차(марковча)의 이야기를 하면서 고려인의 슬픈 역사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분명 가슴아픈 일이었고, 동시에 문화접변의 양상을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인류학적 사례이기도 하다. 소련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김치의 대체물을 만들기 위해 당근을 채썰어 고춧가루와 식초에 버무리고 기름을 끼얹어 저장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에서부터 몽골에까지 유라시아 일대에서 널리 먹는 당근김치 ‘마르코프차’이다. 실제로 국내에 들어온 우즈벡, 러시아, 몽골식당에서는 어김없이 샐러드 메뉴로 이 음식을 팔고 사이드메뉴로 공짜로 주는 곳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내가 마르코프차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김치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한국에서도 꽤나 괜찮은 메뉴라는 점이다. 쿠팡 기준으로 중국산 당근채가 500그램에 2,870원 정도이다. (2025년 5월 29일 기준, 가격은 변할 수 있음.) 같은 쿠팡에서 비비고 썰은 배추김치가 6,920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저렴한 가격이다. 물론 당근채를 마르코프차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춧가루, 식물성 기름, 소금, 후추, 식초, 마늘 등이 필요하지만 이것들을 합쳐도 4,000원씩 하지는 않는다. 즉, 약간의 귀찮음을 제외한다면 마르코프차는 한국에서도 꽤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사실 마르코프차를 만드는데 가장 방해물이 되는 것이 만드는 과정이다. 시판용 당근채는 대개 세척이 되어있지 않아 다시 세척을 한 뒤 완전히 꽉 짜서 물을 빼줘야 한다. 그리고 소금, 설탕, 식초, 후추, 간장, 다진마늘, 끓인 기름을 넣어 버무린다. 사실 완전히 세척되어 물이 빠진 것을 버무리기만 하면 편할텐데 씻고 물을 빼는게 상당히 귀찮다. 하지만 음식을 하는걸 즐기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배추김치보다는 훨씬 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치와의 조리법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갖은 양념’이 들어가는 김치와 달리 마르코프차는 고춧가루, 마늘과 기본적인 간만 들어가는 편이다. 그리고 그 양 역시 아주 조금만 들어간다. 김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끓는 기름을 끼얹어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흔한 요리방식이다. 인도의 ‘타드카’라는 이름이 붙는 요리들이 그런식인데, 향미를 낸 끓는 기름을 얹어서 커리에 풍미를 더해준다. 실제로도 마르코프차는 매우면서도 약간 기름진 맛이 독특하다.
당근은 녹황색 채소의 하나로 몸에 좋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용이나 재료 역시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편은 아니다. 위에 재료들 중에서 고수 가루를 빼먹었는데, 솔직히 안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나머지 재료들은 한국에서도 흔하고 익숙하고 저렴한 재료들이다.
사실 자취생의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야채를 섭취하는 일이다. 고기는 차라리 섭취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다하다 안되면 냉동고기를 먹으면 되기 때문이고, 남는 것 역시 냉동하면 된다. 하지만 채소는 반드시 냉장보관을 해야하고 1주일 전후로 먹지 않으면 시들거나 썩어버린다. 그렇다고 간편 세척 샐러드는 사먹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자취생의 문제가 내가 아니면 식재료를 소비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속이 좋지 않거나 갑자기 외식을 하게 될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싹이 날락말락해서 내일까지 먹어야 하는 양파가 있었는데, 그 ‘내일’에 갑자기 친구와 밥을 먹게 되어서 양파를 소비하지 못했다. 그러면 싹이 난 양파를 억지로 먹거나, 눈물을 머금고 양파를 버려야 한다.
게다가 야채를 먹는 것도 귀찮은데, 애초에 요리를 하는 것도 꽤나 귀찮음을 동반하는 일인데 요리준비를 하면서 야채까지 씻고 썰어서 준비한다? 이건 선을 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야 한식부페처럼 매일 양배추를 채치고, 양상추를 뜯어 씻은 뒤 물을 빼서 샐러드로 만들어 먹는게 베스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만 최소 10분 이상은 준비시간이 소요되고 설거지도 늘어난다. (탈수기와 볼을 설거지를 해야 하지 않겠나.)
자취생 입장에서는 원터치로 바로 ‘딱’ 꺼내 먹을 수 있는 야채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취생들이 ‘엄마가 해주신 나물, 김치’를 받아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물이나 김치를 왕창 해서 냉장고에 박아놓으면 식사 때마다 젓가락으로 꺼내먹으면 된다. 아주 편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는 나물이나 김치도 그렇게 저렴하지 않다는 것이고, 아무래도 이것들은 저장식품이다보니 생야채보다는 영양소 면에서 부족할 수 있다. 결국 이상적인 것은 1주일 정도의 스팬으로 야채를 미리 손질하여 보관하다가 식사때마다 낼름낼름 원터치로 꺼내먹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코프차도 꽤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가격이 저렴한데다,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도 않고, 식초가 들어가서 그럭저럭 며칠은 먹을 수 있다. 또 특별히 호불호 없이 다양한 요리에 잘 어울린다. 괜히 러시아 요리부터 몽골 요리까지 널리 쓰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최근에는 양배추 채에 정착해서 마르코프차를 좀처럼 해먹지는 않지만, 자취생에게는 꽤나 추천하는 아이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