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하다 보면...
"우와아아!!!"
만원 관중으로부터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거다. 시카고의 라이벌 야구팀, 시카고 컵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들이 다 같이 환호를 보낸 건. 1994년 4월 7일, 메이저리그 야구팀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 컵스와 화이트삭스의 시범경기에 NBA 농구 레전드 마이클 조던이 화이트삭스의 선수로 등장하자 관중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NBA에서 이미 전설을 쓰고 있던 그가 왜 야구에 도전하게 되었을까. 1993년 여름,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조던의 아버지는 아들이 야구선수가 되길 바라셨고, 그의 마음속에는 그 바람이 항상 빚처럼 자리 앉고 있었다. 결국 그는 화려한 농구선수의 경력을 뒤로하고 야구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의 마이너리그에서의 야구 경험을 한 뒤, 1995년 그는 농구팀 시카고 불스로 화려하게 돌아오며 외친다.
"I'm back!"
"한국에서는 이번 갤럭시폰 출시가 언제야? 저번 모델은 반응이 어땠어?"
주변에서 종종 듣는 질문이었다.
"한국은 내가 담당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네."
"뭐야, 너 그 회사 다니는 거 맞냐?"
"다른 나라는 잘 아는데..."
삼성전자에서의 10년 가까운 시간을 해외 시장만 보는 업무를 했다. 계속 해외만을 보다 보니 막상 내가 있는 한국 시장을 볼 일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한국 로컬 시장에 대한 궁금증은 숙변처럼 내 어딘가 한구석에 웅크려 그 긴긴 시간 동안 날 신경 쓰이게 했는데, 이직을 하면서 마침내 그 오랜 숙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모바일 IT제품의 해외 시장 업무를 하던 내가 한국 로컬 시장 광고산업이라는 다른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 마치 새로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사회생활 10년쯤 하고 생소한 분야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보드게임에서 맨 처음 칸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지령을 받은 기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로컬 시장 아닌가. 한국 시장에 대해 실컷 배우고 연구하고 한국의 기업을 만나서 한국 소비자를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했다. 10년 동안 안고 있던 숙변이어서, 이렇게 화끈하게 밀어냈나 보다. 그렇게 막연히 궁금했던 한국 로컬 시장이 어떤지에 대해 원 없이 생각한 시간을 2년 정도 가지고 나니, 내가 뭘 잘하는지 그리고 뭘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로컬 시장만을 보는 것보다 문화가 다른 다양한 글로벌 시장을 상대하는 일을 더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을 알게 한 이 경험은, 글로벌 업무를 하는 지금의 팀으로 옮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내가 그 막연한 호기심을 계속 안고 있었으면, 이런 확고한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회사원이다.'
그런데 회사원이 하는 일이 뭘까? 회의, 보고, 자료 작성, 시장분석, 협상, 발표...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는데, 이 정도가 떠오른다. 그래서 난 회사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의 틀은 어떤 꿈을 꾸더라도 저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CEO를 하던, CMO를 하던 내가 하는 일의 종류는 저런 거라고 생각해왔고, 내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도 저 범주 안에서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만났다. 구글의 내 매니저를. 그는 위에 나열한 일도 물론 열심히 하지만, 내가 그간 만나왔던 동료들과는 다른 한 가지의 필살기가 있다. 바로 '강연'. 일반적인 발표와 달리 그의 강연은 발표를 듣는 대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며, 발표 내용도 단순 세일즈 프레젠테이션을 벗어나 4차 산업 혁명 등의 기술 트렌드 정보 전달, 자기 계발 등의 각양각색의 콘텐츠를 다뤘다. 어떤 업체에 광고 세일즈를 할 경우에 보통은 광고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에 대해서 담당 마케터를 대상으로 Sales pitch를 하게 마련인데, 그는 그런 방식이 아닌, 회사 임직원 모두가 참여하는 디지털 세미나를 열었다. 이를 통해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IT기술의 현재 수준과 미래의 트렌드에 대해 강연하면서 디지털 매체에 대한 사내 분위기 자체를 바꾸는 식이다. 그 매니저와 함께 일하면서 많은 강연을 볼 수 있었고, 나 또한 업무 방식의 중요한 수단으로 강연을 많이 활용해 기업 대상의 강연에 설 기회를 종종 얻을 수 있었다.
경험을 쌓을수록 내가 배우고 느낀 바를 타인들과 나누고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앞으로도 얼마나 하고 싶은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직접 해볼 수 없었다면, 내가 가진 숨겨진 장기는 계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술래잡기에서 끝까지 발견되지 않은 참 잘 숨은 아이처럼.
"내가 못할 거라고들 말했지만, 난 할 것입니다."
조던이 야구로 전향하며 기자들에게 말했다. 만약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마음속의 야구에 대한 미련은 지금껏 계속 남아 그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그가 야구와 농구를 모두 경험했기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 그리고 제일 잘하는 것이 농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오랜 기간 NBA의 레전드 선수로 마음껏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꿈은 내가 아는 세상 안에서 찾기 마련이고,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을 하면 할수록 나의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이에 비례하여 꿈의 반경도 넓어졌다. 다양한 경험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지를 검증하게 됐고, 이를 통해 나의 꿈은 구체화가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잘하는 것도 그리고 좋아하는 것도 실제로 해봐야 정확히 알게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지금 당장 꿈에 확신이 없거나 무엇을 잘하는지 모른다고 해도 너무 걱정을 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아직 경험을 못해봐서 일 수 있으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바로 지금부터 아닐까.
표제 사진 출처: pixabay.com/en/milky-way-universe-person-stars-1023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