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도 먼저 맞는 게
"첫 번째 도전은 고유명수, 박명수!"
많이 애정하던 무한도전의 단골 멘트. 출연진이 돌아가면서 미션을 수행할 때, 개그맨 박명수 씨는 '고유명수'라는 캐릭터를 얻어 항상 첫 번째로 도전하곤 했다. 삼행시를 짓고,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새참을 머리에 인채 논두렁을 달리는 그는 항상 첫 번째였다. 처음 순서인 그의 도전은 모두가 집중했고, 더 많이 웃음을 얻었으며, 통편집되는 일도 없었다. 뒤이어 도전하는 이들은 그의 활약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고, 설사 박명수 씨가 재미없게 했더라도, 그의 실패는 그 뒤의 도전자가 나올 때마다 계속 회자되어 웃음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나만 이렇게 느낀 건 아니었나 보다. 실제 박명수 씨가 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첫 번째로 해야 한다. 나는 고유명수라는 별명 때문에 늘 첫 번째에 하게 된다. 그래서 편집될 일이 없다. 그리고 맨 먼저 하면, 부담감도 없다"
"아 제발, 이건 나한테 물어보지 마요..."
MBA에서 제일 무서운 게 콜드 콜이었다. 무작위로 교수님이 학생을 지명해서 질문을 날리는 콜드 콜은, 항상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거나,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 날아오곤 했다.
"Sam, 어떻게 생각해?"
점심 메뉴가 뭘까 잠시 생각하던 중요한 그 순간에 내게 날아온 교수님의 질문. '아, 교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70여 명의 클래스메이트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자. 한참 썰을 풀자, 점점 굳어가는 교수님의 표정. '아, 이 산이 아닌가벼...' 클래스메이트들의 표정도 왠지 '저 한국 친구는 참으로 어리석고 모자라는구나.(순화한 표현)'라고 말하는 듯하다.
후에 MBA에서 요령이 생긴 내가 이 무시무시한 콜드 콜을 피하기 위해서 쓴 방법이 있다. 바로 내가 먼저 의견이나 질문을 날리기. 교수님이 나와의 대화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끼도록, 계속 내가 먼저 의견을 내고, 질문을 하는 거다. 그냥 안다 싶은 내용이면 막 끼어들고, 물어봐도 될법하다 싶으면 물어봤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자, 콜드 콜로 내 이름이 불리는 빈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래, 이거였어!' 사실 귀찮은 일이었다. 수업시간에 상당히 집중해야 하고, 손 번쩍 들고 끼어드는 약간의 뻔뻔함과 당당함도 필요했다. 그래도 어차피 말할 거라면,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을 때 말하리라. 이 작은 노력은 수업시간에 의도치 않게 창피당할 일을 피하고, 나의 조국을 싸잡아 바보 취급당하지 않게 하는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었다.
"저희가 먼저 할게요. 저희 먼저 발표 잡아주세요."
유튜브 광고 영업을 할 때의 일이다. 클라이언트인 모 소비재업체에서 내년도 미디어 플랜을 계획하기에 앞서, 각 주요 매체와 회의를 잡고 있었다. 다양한 좋은 매체들이 많기에, 그 안에서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클라이언트는 각 매체들과의 미팅을 통해, 매체의 장점과 시너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협의한 뒤 다음 해의 미디어 전략을 세운다. 이렇듯 정말 중요한 미팅이기에 다른 매체에서는 준비할 시간을 어느 정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고객사에 미팅을 가장 먼저 하겠다고 얘기했다. 내게 이건 분명히 시간 싸움이었다. 처음에 고객의 마음에 각인을 한 업체가 기준이 되어, 그다음 업체들을 바라볼 것이고, 무의식 중에 고객의 마음속에 내가 얘기한 성과나 마케팅 계획이 타 매체를 평가하는 기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다른 매체들은 2주 뒤에 하기로 했는데, 정말 1주일 뒤에 해도 되세요?" 네, 원했던 바였답니다. 일주일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자료를 준비하고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발표일 당일, '고유명수'가 되었다. 다행히도 나의 제품이 그들의 전략에 잘 맞았던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고유명수' 전략이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그다음 해에는 더 많은 협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아직 백지였던 그들의 마음에 나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회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어요. 앞으로는 팀원 전체가 돌아가면서 회의를 주재하고 구성하세요. 순서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 일하는 글로벌 팀의 주간 회의 진행 방식을 바꾼다는 팀장의 이야기. 앞으로는 팀의 주간회의를,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그날의 주관자가 되어 원하는 대로 회의 내용을 구성하고, A부터 Z까지 모든 진행을 전담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의 모든 업무가 그렇듯,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평판으로 남고 평가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것 하나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다시금 등장한 '고유명수' 본능.
"저희가 먼저 할게요. 다음 주는 저희로 해주세요."
함께 일하는 동료와 짝을 이루어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건 먼저 해야만 한다. 온갖 나라의 날고 긴다는 똘똘이들이 한가득인 팀에서, 모두에게 인상을 남기는 방법은 먼저 하는 것뿐이다. 계획도 없었다. 일단 지르고 보자.
"오 그래요? 빨리 지원해줘서 고마워요. 잘 부탁해요."
그때부터 비상이 걸렸다. 뭘 해야 될까. 동료와 함께 초안을 짜고 개략적인 밑그림을 그렸다. 다행인 건 우리가 처음이라는 것. 처음이라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오히려 처음이란 것이 우리에겐 강점이기도 했다. 우리가 하는 방식이 이 미팅의 기준이 될 것이고 매뉴얼이 될 것이니까. 그렇게 미팅의 주제를 정하고 진행 방식까지 마무리 지었다. 무사히 미팅을 끝낸 뒤, 팀장의 한마디.
"오늘 두 명 정말 고생했어요. 이게 기준이 되어서, 이후에 진행할 모든 팀원들도 잘 해냈으면 좋겠어요."
벌써 부담이 오는 코멘트. 점점 기대치는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다행이다, 먼저 해서.
"나 먼저 때려줘요, 나 빨리 맞을래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지만, 이런 광경은 아무래도 좀 낯설다. '지금 당장은 하기 싫은 일을 일단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저런 이야기를 못하도록 붙잡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콜드 콜을 하시던 교수님이, 미디어 전략을 세우던 클라이언트가, 회의 진행을 맡겼던 팀장이 내게 알려주었다. 먼저 하라고. 그러니까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속 시원하게 먼저 해치워버리는 게 나를 돕는 일이라 생각하고, 오늘도 난 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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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출처: MBC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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