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원* 아홉번 째 인터뷰. 끝없이 움직이는 우주에서의 중심점
(인터뷰 당시 나이 26세, 남자)
요즘 지닌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취직이 제일 고민이다.
가고 싶은 분야가 궁금하네요.
건축을 전공하다가 군대에 다녀온 뒤 광고학과로 전과를 했다. 광고 계열 중에서도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
멋지네요. 어떤 점에서 카피라이터에 끌렸습니까?
짧고 강렬한 한 줄 혹은 몇 음절의 글귀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특히 공익광고에 쓰인 글귀들. 나도 그런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뭔가를 읽거나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었다. 생활습관이 바뀐 거다. 아, 그리고 책 욕심도 많아졌다.
그동안의 모습들을 돌아보면... 의외네요. 하지만 정말 멋있는 습관인 것 같아요. 언젠가 그 수첩 꼭 한번 보고 싶은데요?
노트를 만드는 건 군대에서 우연히 시작하게 된 일이다. 군대에서 시간이 너무 많아 자연스레 생각도 많아졌고, 틈날 때마다 한 번씩 적어볼까 해서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미래의 모습도 한번 그려보실래요? 자신의 이미지 같은.
서른 중반 즈음엔 세련되고 자기 스타일을 갖춘 광고인으로, 50대엔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사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더해서 배우 차승원의 외형과 분위기까지 닮을 수만 있다면...
‘차승원’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네요. 이번엔 과거로 가볼게요. 20대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없다. 음 굳이 찾아보자면 전역할 때?
평상시 잘 웃고 다녀서 즐거운 일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밝게 보이고 싶어 항상 웃으려 노력했다. 고민이나 감정적인 표출을 잘 안 하고 싶어서 늘 웃음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왔던 것 같다.
그럼 감정이 가라앉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생각을 정리하고 시를 쓰는 등 글을 쓰면서 풀거나 기차여행을 가거나 맥주 한 캔을 들고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거나 하는 식으로 푼다. 간혹 주변 사람들이 그러면 더 가라앉고 고독해지지 않느냐고 묻는데, 나는 이런 고독이 좋다. 생산적인 고독감. 특히 맥주를 들고 새벽녘에 동네를 산책하면 머리를 정리하는 데에 그만이다. 완벽하게 혼자 있고 싶은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얼른 독립해서 집에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생산적인 고독 좋죠. 하지만 맥주를 들고 새벽에 돌아다니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무섭게 비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본인이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친놈인 건 확실한 것 같다. 부천 미친놈. 그 외에는 어떤 특정 성향이나 단어로 정의되고 싶지 않다. 아, 장난기가 좀 많은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대체적으로 만족을 잘 못 하며 소소하게 느끼는 행복들에 둔감한 것 같기도. 자잘한 고민이나 생각이 많아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사회가 지우는 기존의 통념들, 강압성을 띠는 모든 것들을 싫어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색깔로 당신을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색일까요?
검은색과 흰색의 그라데이션 팔레트에서 회색 어디쯤.
기준선을 명확하게 긋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회색 ‘어디쯤’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서히 밝아지는 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회색일지라도.
오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내일 당신이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나 자신에게 남기고픈 말이 있나요?
잘 놀았다.
하지만 만족의 ‘잘 놀았다!’가 아니라 아쉬움이 남는 ‘잘~ 놀았다’이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늙어 보인다는 느낌을 부쩍 받기도 하고 나이가 스물여섯인 게 적응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삶의 속도보다 내 삶의 시계가 더 빨라 버겁다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만약 스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클럽을 일주일 내내 쉬지도 않고 갈 거다. 불태우며 젊음을 만끽할 테다.
인터뷰를 마친 뒤
190에 가까운 큰 키에 밀가루 반죽같이 하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땐, 북극곰 같은 순수한 이미지였다. 멀대 같고 어딘지 모르게 굼떠 보이는 대형 북극곰. 함께 건축과를 다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광고학과를 가겠다고 훌쩍 떠나고, 모델을 하겠다고 선언해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한동안은 바텐더로 일했으며, 카피라이터, 최근에는 승무원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모두들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다음엔 뭘 할 거냐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했던 자리를 벗어나 다른 궤도로 이탈하는 것은 몇 배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 막막함이 무서워 불평을 일삼으면서도 별수 없이 현재의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행성들을 보았기에.
이런 직업도 경험하고 저런 직업도 경험하는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 하나! 바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는 ‘나만의 수첩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물론 우주의 그것처럼 아득하다는 군대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필사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만의 생각과 아이디어, 이야기와 시가 담긴 노트를 차곡차곡 만들어가는 것은 정말 좋은 습관임에 틀림없다. 꾸준하게 적어 내려 간 모든 것들이 언젠가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세우려 할 때 단초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 중, 맥주캔을 들고 부천 골목길을 방황하는 북극곰을 본다면 혀를 차는 대신 응원을 보내주는 건 어떨까? 그가 미래의 시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마음의 정원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