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한량 Jan 06. 2019

나의 세계를 짓는 법

당신의 정원* 여섯번 째 인터뷰. 빛깔 좋게 익어가는 이의 이야기  



나의 세계를 짓는 법

(인터뷰 당시 나이 27세, 여자)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사회에 나오고 직장을 다니면서, 의례 그렇듯 무언가를 배우고 쌓아가기보단 무한정 소비만 되는 느낌때문에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고 있으시죠. 학교에서의 생활과는 차이가 있나요?


학교에 다니고 있을 당시에는, 내 의지대로 디자인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체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한 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창조하고 그려가는 학교 생활과는 달리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물론 돈을 벌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다. 나는 그것이 가슴 뛰는 순간들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가슴 뛰는 일’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진한 향수가 느껴져요. 지금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조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현재 업으로 삼고 있는 직업과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다. 한없이 괴롭게 만들다가도 하나의 작업을 완성하고 난 뒤의 뿌듯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런 밀고 당기기 속에서, 20대라는 시간은 기본을 닦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자주 들여다보고, 또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 점점 쌓이고 쌓여 나만의 감각을 형성하고, 3, 40대가 되었을 땐 그 기본기와 나만의 감각이 만나 깊이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즈음이면 내가 쌓아온 능력과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가슴 뛰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멋있네요. 이 장기레이스를 차근차근 달려가며 좋은 디자인을 많이 만들어내실 수 있길 바래요!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다고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한가지 영역에서 두드러지기 보다는, 사회(일), 사랑, 감성(취미)의 세 영역을 고루 채워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이 세 가지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가면서도 또 함께 채워주며 나를 완성해가는 모습이었으면 한다.


사랑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인들에게 눈이 너무 높다는 말을 자주 들으시던데요. 어떤 사람 혹은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연인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적정한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끌려가지도 또 너무 당기지도 않는, 밸런스가 잘 잡힌 관계가 좋지 않을까. 그림을 그려보자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하나 있는 것이다. 함께 있되 떨어져 있는. 그렇기에 부딪히지 않고 서로의 안전거리 안에서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정도의 연인관계를 원한다.


타인과의 이격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나요?


부모님과도 그렇고 친구들과도, 심지어 연인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늘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 자취를 하면서 세상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정말 행복했다. 나는 이격거리를 유지해야만 얻을 수 있는 고독과 정신적 충족의 시간이 좋다. 사람들은 더러 외로움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고독을 나만의 것들로 한땀 한땀 채워나가다 보면 내 삶을 더 잘 끌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 차갑게 들리기도 하지만 막상 친구들과의 관계를 보면 또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요.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도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앞서 얘기했듯 늘 적정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상대방이 원하면 적당히 개입하며 나를 열어주기도 하고! 어렸을 땐 그 개입의 타이밍을 찾는 데에 서툴렀지만, 소설책을 많이 읽으면서 그에 대해 많이 배우고 포용력 또한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느낀다. 소설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타인의 생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사람을 색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지금의 당신은 어떤 색깔일 것 같습니까?


핑크와 보라가 섞인 색상.

조금 구체적으로 올챙이 알처럼 가운데에는 생기있는 핑크빛이 있고 그것이 회색의 막으로 씌워진 느낌이다. 지금은 애매한 중간 어디쯤 있지만, 내가 완성된 다음에는 막이 깨지고 안에 있는 핑크색이 활짝피는 상상을 해본다.


당신이 이 인터뷰를 끝내고 나가는 순간 죽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남기는 말이 생의 마지막 말이 된다면 어떤 말을 남기실 건가요?


잘했어. 잘 살았구나.





인터뷰를 마친 뒤


갓난 아기일 때의 우리는 먹고 놀고 자는 단순한 굴레 속에서 크게 다른 특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청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스스로를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시킨다. 개성이 아예 말살되거나 더 또렷해지기도 하고, 취미를 키우고, 공부를 하거나 연애 혹은 여행을 하는 등 갖가지 경험과 거듭되는 정체성 확립과정을 통해 한 인간을 제손으로 완성해 가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에 따라 서서히 추한 어른이 되느냐 멋진 어른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그런 관점에서 친구는 내가 만난 아주 멋진 어른 중 하나였다. 휘황찬란한 라벨과 마케팅이 필요 없는 그저 잘 만들어진 좋은 술, 블록버스터급의 광고 없이도 입소문을 타 명작의 선반 위로 저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영화처럼, 굳이 향수를 뿌리고 화려한 물건들로 휘감지 않아도 고유의 향과 멋이 우러나는 사람. 친구는 주변의 이야기들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늘 자기만의 이야기, 취향, 기준 등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지속해왔다. 나는 매사 신중한 모습으로, 그러면서도 특유의 소녀같이 맑은 감성 또한 잃지 않는 그녀의 삶의 방식을 좋아했다. 유행에 민감한 사회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기에.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친구는, 그리고 우리는 어느 색을 발하고 어떤 향을 피워내는 사람이 될까?  







마음의 정원 한 조각


이전 06화 내 노인 안의 소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