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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한량 Dec 29. 2018

유리 조각들로 쌓아 올린 사다리

당신의 정원* 네 번째 인터뷰. 내 길을 단단하게 짓는 이의 이야기 



유리 조각들로 쌓아 올린 사다리

(인터뷰 당시 나이 27세, 여자)




요즘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불확실한 미래가 가장 큰 고민이다. 5년 동안 공부했던 전공을 뒤로하고 새로운 분야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준비한 것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처음 시작하는 일이기에 더 그렇게 느끼실 것 같아요. 그래도 제 눈엔 졸업 후에 시작한 일인데도 과정들을 착착 잘 밟아나가는 것 같은데요?


운이 더 좋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막 시작한 나에게 강의 기회를 주시는 감사한 분들도 많았고, 회사 원장님의 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요?


우선 향후 2년 뒤 즈음, 경영대학원에서 지금의 일을 하면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DISC(성격분석 시스템) 자격증도 따고 싶다. 사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요즘 배우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배울 것들 천지라는 생각도 들어서다. 트렌드도, 사람에 관한 것도, 다른 분야들도 그렇고.


멋있어요! 금방 해내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 어렸을 때의 이야기들을 조금 들어보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음, 나는 두 살 많은 오빠가 있다. 마치 그 옛날 어느 신파 드라마처럼 어렸을 때부터 오빠는 집안의 온갖 사랑과 투자를 다 받고 자랐고, 동시에 둘째 딸인 나는 많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충족되지 않는 것들로 인해 자신감이 많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십 대가 되면서 공부도 이런저런 활동도 열심히 하며 처음으로 가슴 뛰는 성취감도 맛보고, 내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자신감을 많이 회복하셨다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네요! 그 이후로 20대는 어떻게 흘러갔나요?


스무 살이 넘어 대학 그리고 사회로 나오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하나같이 인생에서 오래도록 함께하고픈 사람들이었다. 도움도 주고받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며, 처음으로 인간관계의 소중함도 깨닫고 감사함도 배웠다. 하지만 늘 기쁜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빠가 한참을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났을 땐 정말이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가족들 중 나를 가장 믿어주는 정신적인 지주였기에 더 아팠던 것 같다. 호스피스 병동을 왔다 갔다 하며 간병을 하면서도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던 그분께 떳떳한 딸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고 이듬해에 장학금까지 탔다. 앞으로도 아빠를 생각하며 더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아버님께서 분명히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요즘은 전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 같아 참 좋아 보여요.


대학 시절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많이 몰아쳤던 것 같다. 하지만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 규칙적인 삶과 여유시간도 얻어 데이트도 하고 주말엔 기타를 배우러 다니며 바람 흐르는 듯 여유롭게 사는 법을 알아갔다. 인생이라는 용수철에서 20대 초반이 압력이 빈틈없이 팽팽하게 가해진 구간이었다면 지금은 압이 빠져 풀어진 느슨한 구간이다. 그 여유 있는 용수철 위에서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갖고 걱정이나 조바심을 덜어내는 것도 배웠다. 충분히 잘하고 있고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된다고 늘 되새긴다.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색입니까?


흰색

나는 지금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초입에 서 있는 것 같다. 완전한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하는 지금의 나이기에 흰색이다.


오늘 인터뷰를 끝으로 당신이 죽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 자신에게 남기고픈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요?


수고했어, 이제 또 다른 시작이구나.

투쟁하듯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제일 먼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죽는 순간이 완전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부터가 또 새로운 시작이라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기대에 찬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를 마친 뒤


나를 먹먹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 철이 너무 빠르게 들어버린 아이들을 보는 것. 나이에 비해 풍파를 많이 만나 너무도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 한켠이 늘 저릿하다. 혼자 묵묵히 그 비바람을 견뎌내느라 참 고되었겠구나 싶어 등을 토닥이고 힘껏 안아 주고픈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나를 지면 아래로 고꾸라지게 만드는 거대한 중력 앞에서 불평하고 주저앉는 대신 친구는 한 발짝 두 발짝 이를 악물고 걷는 방법을 택했다. 나만의 길을 다듬고 쌓아 올려 대지 위로 날아오르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던 친구가 최근, 울타리같이 든든한 사람을 만나 가정이란 집을 짓고, 안정적이고 성공적으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주기적으로 여행도 다니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친구는 이제 안다. 들어도 꾸준히 걸어가다 보면 그 길 어딘가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 느리더라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은 온다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멋지게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과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해 주어 영혼의 공백마저 메워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 무거운 중력의 시간들을 지나 그녀가 매일매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이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혹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친구의 아버지도 늘 그렇게 저 멀리서 그녀의 인생을 위해 기도해 줄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며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괜스레 별이 더 반짝거리는 느낌이다. 





마음의 정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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