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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한량 Dec 13. 2018

스위치 오프, 휴식의 시간

당신의 정원* 세 번째 인터뷰. 삶에 지쳐 길을 떠난 여행자의 이야기 



스위치 오프, 휴식의 시간

(인터뷰 당시 나이 33세, 여자)




어떤 계기로 인해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오게 되셨나요?


그냥 무난하고 성실하게 직장과 집을 오가는 평범한 생활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여기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 모든 것들이 멈춰버린 느낌,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이탈리아로 오게 되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집을 떠나 지금은 이곳 피렌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을 도우며 그렇게 지내고 있는 중이다.


멋있는데요! 엄청 낭만적으로 들려요. 왜 많은 사람들이 꿈꾸잖아요. 나를 괴롭히는 상사에게 가슴속 품어두었던 사표를 집어던지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 상상. 직장인의 로망이라고 하던데요.


생각만 해도 통쾌하지만 당시엔 그렇게 사표를 집어던지는 패기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난 너무 지쳐있었고 그저 내가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곳으로 가 조금이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어떠세요? 어느 정도 에너지를 회복한 것 같나요?


너무 좋다. 매일같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억지로 출근길에 올랐다면 지금은 알람 없이도 벌떡 일어나 상쾌한 마음으로 아침을 연다. 햇빛이 좋으면 산책을 하고, 배가 고프면 장을 봐 정성 들여 요리를 하고, 이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여러 타입의 손님들과 대화도 나누고 술도 한 잔씩 기울이며 느긋하지만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쓸 수 있는 자율성과 주도권을 얻은 것 같다. 물론 예전처럼 넉넉한 수입은 없더라도 내 삶이 내 것이라는 느낌을 온전히 누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기도 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이 어떠실지 궁금해요.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피렌체로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오래된 미술관과도 같다는 이곳은, 그냥 걷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곳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는 생활은 어때요?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20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그들과 짧게든 길게든 대화를 나누는 게 재밌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아, 왜 나는 좀 더 어린 시절 용감하게 떠나오지 못했을까’하는 후회도 가끔 해본다.


지금 이렇게 오신 것도 대단한 일이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계시나요?


언젠간 돌아가야겠지만 당장의 문제는 아니다. 모아놓은 돈도 아직 남아있고, 지금까지는 그저 잉여처럼 흘러 보냈지만 이제부터는 이탈리아어도 공부하고 미술수업이나 가죽 공방 같은 곳에 다니며 조금 더 이곳에서의 생활을 만끽해 볼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여행객 3천만 시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여행을 떠난다. 내 경우는 낯선 장소에 던져졌을 때 온몸의 감각이 열리면서 새로운 환경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또 더불어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을 사랑한다. 


그런 여행지 중 한 곳에서 스친 인연인 이 친구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좀처럼 행하기는 어려운 ‘나 회사 때려치우고 해외로 뜰 거야’를 실현한 사람이었다. 유독 게을러 남들이 다 떠나고 없는 게스트하우스의 식탁에 남아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세상의 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느낌을 공유했다. 친구는 자신을 회사와 사회로부터 너무 지쳐 이곳 피렌체로 떠나 온 도망자라고 소개했다. 유배지치곤 너무 우아하고 낭만적인 것 아니냐는 내 말에 그녀는 한껏 웃으며 살면서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화답했다. 


왜 이곳이 그녀의 피난처가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피렌체는 중세도시 특유의 좁은 길과 숨도 못 쉬도록 빽빽한 건물들이 빛을 날카롭게 깎아내 깊은 그림자를 남기고, 웅장한 종교적 장소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들의 아름다운 피조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으며 차분하고 어두운 색채가 무게감을 더해 도시의 침묵 속으로 나를 완전히 감추고 홀로 사색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부러운 유배지가 아닐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세상의 일부로서 열심히 기능하고 있던 나의 톱니바퀴가 우수수 부서지며 파업 선언을 하는 그런 때가. 인터뷰를 하며 나는 그녀에게서 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인생의 파업기간을 이겨내는 간단하지만 현명한 방법 하나를 배웠다.   


더 이상 지쳐 걸을 수 없을 땐 레이스에서 잠시 벗어나도 좋다. 다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는 시간을 가져라.

 

그렇게 연장을 내려놓고 나만을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인생의 진정한 휴식을 얻고 즐거운 일들을 누리며 다시 돌아올, 혹은 더 멀리 떠나갈 에너지를 충분히 비축하는 시간을 가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음의 정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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