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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한량 Nov 28. 2018

그리고 다시 봄

당신의 정원* 첫 번째 인터뷰. 새 봄을 맞이한 숲의 이야기



그리고 다시 봄

(인터뷰 당시 나이 31세, 여성)



요즘 어떤 고민, 하고 계시나요?


내가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제 기억으로는 항상 밝고 이런 부류의 고민을 잘 안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가 그랬던가… 정말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탄하고 따뜻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하는 고민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부터 비롯된다. 첫째로 직장! 업무량이 상상 이상으로 많아 우선 몸이 지치고, 부정적인 기운을 시종일관 뿜어대는 상사 때문에 정신마저 탈탈 털리는 기분이다. 사람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이 막 두근거리는 경험을 살면서 처음 겪어봤다. 물론 인사팀에 얘기를 적극적으로 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책임감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버텨볼 생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작년, 길었던 연애와 짧았던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인생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보게 되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괜찮으신가요? 친구라면서 아무것도 몰랐네요. 미안해요.


그 당시엔 정말 힘들었었다. 하지만 엄마마저도 독하다고 할 만큼 나는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숙제만이 남았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으로 털어놓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혼이라는 큰 사건으로부터 함몰되지 않고 이렇게 빠르게 다시 회복하게 된 동력은 무엇이었던 것 같아요?


후회 없이 사랑하고 내가 가진 모든 마음을 다했었기에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 앞으로 나아갈 길, 내 인생으로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을 다닐 때는 학교와 집만 주로 오가는 생활을, 졸업 후엔 공부하느라 2년을 써버리고 그 후엔 바로 결혼을 하느라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요즘 다 해보고 있다. 집에 늦게도 들어가고 술맛도 알아버렸고(소주가 참 좋다) 취미 활동을 하며 일상을 다채롭게 채우는 요즘,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된 것만 같다. 세상에 눈을 뜬 느낌이랄까. 최근에는 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리스트 한번 보고 싶어요!


혼자 여행하기, 패러글라이딩, 보드를 타거나 동호회에서의 취미 활동, 템플 스테이, 서핑 등이 있다. 출발점으로 지난 5월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뭐라 해야 하나. 살면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너무 좋았다. 종일 행복하고 또 뿌듯하기도 했다. 그 들뜸이 어느 정도였냐면, 평범한 아파트 단지랑 버스마저도 예뻐서 사진으로 찍고 다녔을 정도. 부산에 갈 계획이 있다면 주민들만 안다는 황령산의 야경도 추천한다! 그리고 요즘 보드 타는 걸 즐기는데, 다양한 기술도 배우 고 새로 사귄 동네 친구들과 퇴근 후 함께 보드를 타고 캔맥주를 한잔하는 시간도 참 좋다.


일상이 다채롭고 꽉꽉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동안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 것들도 있나요?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알랭 드 보통의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내 경우와 유사하게 두 주인공이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과정이 통채로 적혀있는데, 그걸 보면서 아, 이런 경우도 다 있구나 했고, 내상황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웹툰 [독신으로 살겠다]를 보며 내가 겪은 일들을 좀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닥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일상도 마음도 제자리로 잘 돌아오고 있으니 이번엔 미래를 그려볼게요. 삼십 대의 굵직한 인생계획 같은 것이 있다면요?


지금의 일터인 시청에서 도청으로 옮겨보고 싶다. 물론 일은 똑같이 많겠지만 왠지 한 번은 해보고 싶은 그런 마음. 도청 공무원 시험도 준비하고 한자 자격증도 따서 자격요건을 갖추는 것이 우선 목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원봉사를 다녀오고 싶다. 나는 지금 뭐랄까,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 내 작은 도움을 건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조금씩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마지막으로 아까 얘기했던 소소한 취미들과 레저로 중간중간 여가를 누리면서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살면서 인상 깊었던, 강렬하게 남아있는 경험들에 대해 들려주세요.


고등학교에 합격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그 학교는 내 내신으로는 가기가 힘들었고, 선생님들도 아마 안될 거라며 2군 학교를 권했었다. 하지만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해서 결국엔 합격했고, 어떻게 보면 살면서 처음으로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한 순간이었기에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다. 같은 맥락으로 한 번의 낙방 후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듬해 공무원 시험에 붙었을 때도 뿌듯했다. 노력하면 되는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달까. 그리고 바로 지금이 참 좋다.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갈까 고민하는 오늘이 소중하다.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색일까요?


회색과 하늘색이 섞여 있는 다소 혼탁한 하늘색.

과도기 같은 현재는 불순물이 섞인 것 같이 채도나 낮은 하늘색이지만, 점차 맑은 하늘색으로 바꿔 가는 것이 최종 목표다.


오늘 인터뷰를 끝으로 당신이 죽는다고 가정해볼게요. 나 자신에게 남기고픈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네 삶은 불완전했기에 더 아름다웠어. 잘 살았어. 수고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벽한 삶을 꿈꾸지 않나. 그게 좋은 직장이든 사랑이든 결혼이든. 그리고 그 완벽한 걸 이루기 위해 아주 치열한 하루하루들이 반복된다. 한데 현기증이 날 만큼 치열하게 살아도 완벽한 삶을 쟁취하는 건 녹록지 않았다. 나도 동화처럼 행복하고 완벽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벌어진 이 완벽하지 않은 삶을 인정하고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슬퍼하지 않고 잘살아 보겠노라 다짐했다. 행복하게 살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삶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불완전했지만 아름다웠노라고. 참 수고 많았다고.




인터뷰를 마친 뒤


친구는 최근 진한 상실감을 겪었다. 오랜 친구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었기에, 대낮에 사람이 꽉 찬 카페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눈물을 찍어내다가 이내 그냥 웃어버렸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진흙밭을 만난다. 진흙밭 당첨권을 하사하는 신은 그 성미가 참 고약해 인간에 대한 숙려의 기간도 자비심도 갖지 않는다. 또 그 무작위함이란… 큐피드의 화살만큼이나 맥락도 이유도 없다. 그래서 숱하게 나오는 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당첨되는 것은 신에게 달렸지만, 이 진창 속을 허우적대다 수장되느냐 얼룩 하나 없이 산뜻하게 걸어 나오느냐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는 그 어떤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멋지고 현명하게 대처했고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또 삶에 대해서도 혼자만 훌쩍 커버린 느낌이라 낯설기도 했고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녀가 나에게 전한 비결은, 후회가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연애던 일이든 간에 온전히 마음을 다했던 사람만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산불이 나면 숲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나무들이 전소되어 당장은 생태계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빛의 통로가 열리면서 그 아래 잠재해 있던 더 다양한 식생들이 번성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불을 내 산을 복원시키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친구는, 바로 이 불에 타버린 나무들 위로 이제 막 새봄을 맞이한 산 같았다. 민둥산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심고 키워내 다시 숲을 채울 것이다. 인터뷰 끝에 나는, 그녀의 산이 재생되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확신했다. 너의 삶을 항상 응원하고,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마음의 정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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