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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Feb 19. 2020

25회 다시 중국으로(完)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25회 -다시 중국으로-(完) 



                                                                                                                                                                                                           

2014년 12월 뉴욕 맨해튼에 도착 후 바로 찍었다

  2014년 12월


  뉴욕에서 여행 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서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으로 가는 길이다. 셀레 인다. 나의 첫 서양 여행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동안 나는 원하던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그렇게 원하던 소속감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와서 느낀 우울감과 외로움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던 거 같다. 소속감이 채워지니 자신감이 생겼고 생활이 즐거웠졌다. 하지만 아직도 가족과 사는 건 불편하다. 부모님 잔소리의 끝은 어디일까?       

   







2017년 3월      

대만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중정기념당에서



  대만 타이베이로 가는 길이다. 중국 대륙은 수도 없이 가보았지만 대만섬은 처음이다. 대학교, 대학원 1학년을 맞추고 늦즈막하게 간 군대를 제대하고 가는 첫 여행이다. 제대하자마자 대학원 석사 3학기 복학을 신청했고, 선택한 수업이 늦게 잡히는 바람에 수업 가기 며칠 전 대만 여행을 택했다.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라 무척 설렌다. 아참, 난 이제부터 혼자 서울에 살게 됐다. 한국에서 4년 동안 부모님과 살던 기억을 뒤로하고 이제 꿈꾸던 서울살이를 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홀로 지내는 나의 서울 라이프는 어떠할까?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 다뤘던 피렌체의 아경

   2018년 11월  


   이탈리아에 가는 길이다. 로마 , 피렌체, 베네치아 3개 도시를 가족과 함께 여행할 계획이다. 나는 2018년 코스모스 학기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에서 5학기 만에 얻어낸 성과이다. 그래서 수고했다는 의미로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홀로 서울에서 지내면서 , 한국에 정을 많이 붙였다. 중국에서부터 혼자 사는데 익숙했던 나는 혼자 서울살이를 하니 부쩍 한국이 좋아졌다. 또 가족과 사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가끔씩 가족들을 만나니 더욱더 애틋해졌다. 10년의 중국 유학이 남긴 부작용이라고 할까? 그래도 내가 편하고 좋으니 좋다. 서울에 있으니 공부하면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환경도 훨씬 좋다. 또 같이 유학했던 친구들도 많아서 좋다. 한국에서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점점 한국이 좋아진다. 이제 여행을 다녀오면 취업을 하던지 , 박사를 진학하던지 결정해야겠다.          



2019년 7월     

태양이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아


발리로 가는 비행기 안     


  이번 여행의 비행기는 좌불안석이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의 꿈인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좋다는 주위의 설득에 넘어가버렸다. 그리곤 자연스레 나의 전공에 맞추어 중국으로 선택했다. 처음엔 중국 학교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취업을 하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원했다.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도 되니 좋았고 한국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지내는 게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발리 여행을 다녀오고 취업준비를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발리로 여행 오기 일주일 전 중국 학교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 늦은 합격소식이었다. 더불어  좋은 조건으로 가게 되었다. 4년 학비와 생활비, 숙소를 제공해준다는 거였다. 다른 이들 이였으면 너무 신이 나서 박수라도 마구 칠만 했지만 난 이 소식을 듣고 너무 암담했다. 그리곤 자연스레 바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행기 나의 바로 옆좌석에서 곤히 자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하니 울컥한다. 한국에 와서 방황하는 동안 이 사람을 만나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짦다면 짦을수 있는 시간이지만 일정한 시간 동안 추억을 쌓으며 호흡했던 이 사람과 떨어져야 한다니... 상상할 수 없다. 왜  나는 이 좋은 소식을 난 기뻐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가...  두렵다.


  하얀 피부를 가진 이 사람은 내가 한국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항상 바쁘게 지내온 나의 곁에서 묵묵히 옆에 있어준 사람이었다. 나를 배려했고, 나를 1순위로 생각해주었다. 미처 내가 바빠서 그 배려를 모르는 척한다 해도 잠시 투덜거리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 사람이 나에게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니고 억만금을 주며 사랑을 준 것은 아니다. 그저 항상 공부와 바쁨에 지처있는 나의 뒤에서 말없이 응원하던 게 전부였다.  난 한 번도 이런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사람에게 이런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욕심 많고 야망적인 내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에는 아무런 욕심 없이 소소하게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꾼다. 동시에 앞으로 서로 함께할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 그래도 되는 거 같았고 그럴 줄 알았다. 이랬던 나의 마음에 박사 4년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툭하고 떨어졌다. 좋게 생각하려 하지만  이제 중국으로 가면 박사 4년 동안 떨어져야 한다니... 앞이 캄캄하다.      


나는 자신에게 괜찮다며, 나만 연락을 잘하면 거리 따위는 상관없을 거라고 자신하다도,

어느 순간 나의 사랑에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먼저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이 사람이 너무 힘들면 내가 채워 줄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착잡하다

어떻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진리가 나에게는 비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또한, 그동안 6년이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어렵게 적응한 나 자신을 돌이켜 보자 하니... 중국에 가고 싶지 않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가는 게 맞지만, 이성적인 나도 이번엔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싶다.  살아오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것들에 후회한 적 없지만 이번엔 왠지 후회할 것 같다. 한국에서 적응된 생활을 놓기 싫었고, 가족과 다시 멀리 떨어진다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친해진 친구들과 자주 못 보는 것도... 이 모든 걸 박사학위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우울하다.     


내가 너무 어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잡아야 하는 기회인데 내가 머뭇거리는 것일까


꿈이 뭐길래... 많은걸 버리며 얻어야 하는 것인가?

만약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하려나?

만약 포기하면 부모님의 기대가 우스스 무너지려나

만약 포기하면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려나?

만약 포기하면 이사랑이 끝났을 때 그 사람에게 원망이 남으려나

만약에... 만약에... 수많은 가정을 하면서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내 꿈을 바꿔 버릴까? 목표를 포기하고 다른 목표로 재설정할까? 난 적응의 아이콘이니 다른 목표로 정해도 금방 적응하지 않을까??? 아니야 이건 좋은 기회야, 이 기회를 차 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다. 이성과 감정이 내 머릿속에서 깊게 빠고 들어 전쟁을 한다. 그렇게 며칠을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내 머릿속을 휘집어 놓았다. 이번엔 감정이 이기기를 바라며...     


  하지만 나는 결국 난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앞으로 외로울 것이고 힘들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난 결국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다. 전생에 독립군이었는지 , 어딘가에 적응할만하면 짐을 싸고 적응될만하면 떠나는 내 인생... 나이 서른에 이제 어딘가에 정착됐다 싶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주위에서 축하 인사가 쏟아진다. 앞으로 승승장구할까라고 했다. 며칠을 축하인사를 받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소중이 지켜오던걸 뒤로하고 새로운 걸 개척하려 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말할 것이다. 좋은 기회에 사소한 감정 때문에 고민하는 바보라며... 차라리 중국인이 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감정이 들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감정들이 단 한 번도 사소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사람은 그만큼 소중했고, 습관처럼 내 몸에 박혀있다. 아쉽다 아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기심이, 나의 보장되어 있지 않은 미래를 건든다... 그래 가서도 나만 잘하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어, 가서 중국으로 데리고 올 방법을 찾아보자.

그렇게 다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2020년 1월 5일    

 

  겨울방학이 됐다. 한국으로 간다. 나의 박사 첫 학기는 행복하지 않았다. 내 예상과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외로웠고 쓸쓸했다. 그리고 이별했다.

     

  내가 맨 처음 중학교 때 중국에 갔을 땐 느꼈던 이질감, 서먹함,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적응하려고 미친 듯 노력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문화를 배우기 위해 , 살아가기 위해...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나의 소소한 감정 따워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중국은 그때와는 다른 힘듦의 시간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 그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모든 생활이 즐겁지 않게 느껴졌다. 나의 습관과도 같았던 사람과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헤어지다니... 충격을 먹은 거 같았다. 나를 사랑에 미친놈으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난 그렇다.

    

  또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익숙함에 빠져버린 나의 식어버린 열정이었다.  나에게 베이징은 더 이상 적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한 도시였다. 이제는 자신 있는 언어와 문화, 매번 가던 길과 익숙한 풍경들이 나를 반겼지만 그때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은 2020년 현재에는 없었다. 중국인 친구들은 다들 일을 하러 전국 각지로 퍼졌고, 같은 한국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지내는 중이다.     


  모든 추억의 장소들은 여기에 남아 있지만, 같이 공유했던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많이 쓸쓸했다. 이 길을 걸을 땐 누구와, 이 식당에 갔을 땐 누구들과, 어딜 가든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펼쳐지는 시간이었고 과거의 기억에 사로 잡혔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여행도 다녀오고, 명상도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없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자 라고 생각도 했지만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니 의외로 친구들도 사귀기 어려웠다. 내가 낮을 가리고 숫기가 없는 성격을 가진 탓도 있었고 다들 이미 클 때로 커버린 그들과 어렸을 때처럼 순수하게 만나기 어려웠다. 그냥 수업 같이 듣는 형식적인 사람들이 다였다.       


  어느 날 문득 기숙사 방안에 있다가, 음식 배달 전화가 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무척이나 졸렸고 나른했다. 또 잠을 자려고 한다. 우울증 초기 증상인지 시간만 나면 일부로 자려고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핸드폰이나 만지작 거리자며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한창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있었을 때 핸드폰 통화목록이 눈에 들어왔고 버튼을 눌러 목록을 보았다.   

   

  나의 핸드폰 통화 목록엔 모두 숫자뿐이다. 온통 배달 기사분들 번호뿐이었고, 생각해보니 3일 동안 내가 말 한마디 하지 않음을 느꼈다.  외로웠다. 처절하게 외로웠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는 베이징에서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순간 누군가 내 방에 쳐들어와서 나랑 싸움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쳐 들어온 자와 말이라도 할 테니까...    

      

  나는 오늘도 위로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일어나고 나면 매일이 응가를 하고 안 닦을 기분이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나는 미래를 위해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이라고... 나는 잘하고 있다고... 이 마지막 고지만 오르면 된다고, 조금만 힘을 내자고 파이팅하자며... 속으로 소리친다. 이렇게 매번 왔다 갔다 적응만 하는 삶을 지낼 바에는 차라리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고약한 놈들이 쳐들어 온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덮친다. 또...


  동시에 한국에서  이미 자리 잡고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머릿속에 스친다. 이미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내 친구들도 있다.. 또 박사학위를 따고 별 볼 일 없이 지내는 망상 속의 나도 존재한다. 또 당연히 내 머릿속에 가장 많은 기억을 찾이하는 그 사람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보고 싶다. 연락을 해보고 싶다. 하지만 면목이 없어서 도저히 할 수 없다. 내 진심을 알릴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그걸 이용해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나쁜 생각이 난다.  안 되겠다. 이 현실에 적응해야지, 빨리 잊어야지... 나쁜 생각들을 얼른 깨버려야지... 와장창 깨버려야지   

 베이징 오도구에서 육도구로 걸어가는 그 길목에서 나는 오늘도 추억과 현실의 교차점에 서있다.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그렇게 한참 새로운 인생에 적응 중인 중국 유학 11년 차 청년이 추억과 현실이 뒤섞인 체 베이징 길 한복판에  서 있다.    


"차라리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모두 다 잃지 않고 지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再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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