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인간에 대한 생각
J와 처음 식사하는 날이었다. 키가 작아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 구두의 힐은 괜찮겠지, 했는데 J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키가 작았다. 구두를 벗어도 나와 몇 cm 차이나지 않을 정도의 키였던 것이었다. 그 날 나는 힐을 신고 온 것이 미안해서 나란히 걸을 때 일부로 더 구부정하게 걸었다. 그렇게 기억속의 J와의 첫 만남에는 J의 작은 키와 구부정한 내 모습이 있었다.
작년 말 시부모님과 함께 쇼핑을 하던 중 한 매장에서 J와 내가 입을 셔츠를 고르게 되었다. 재질도 컬러도 마음에 들었고, 같은 디자인의 남성용, 여성용 셔츠가 있어 J와 커플로 입고 다닐 수 있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막상 옷을 입어보니 여성용 셔츠를 입은 나는 소매길이가 어느 정도 맞은 반면, 남성용 셔츠를 입은 J에게는 소매길이가 턱없이 길었다.
나와 비슷한 키인데 왜 소매길이가 이토록 차이가 나야 하는 걸까?
J의 손을 한참 덮은 소매를 보고 뭔가 한 대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살면서 나는 딱히 수선할 필요도 없이 옷을 샀기 때문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날 새삼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표준'의 존재를 깨달았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10년마다 소아청소년 성장도표*를 발표하는데, 2017년 신체발육 표준치에 따르면 18세 남자의 표준 키는 173.6cm라고 한다. 그야말로 J는 키에 한해서 '표준 미달'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성장도표는 우리나라 소아청소년의 신장, 체중 등 신체계측치의 분포를 보여주는 백분위 곡선으로 저신장, 저체중, 비만 등 소아청소년의 성장상태를 평가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소아과학회는 공동으로 1967년부터 약 10년마다 성장도표를 제정·발표하고 있으며, 2017년 12월 「2017 소아청소년 성장도표」를 제정·발표하였다. <출처: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
그런 J가 기성복 매장에서 옷을 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깨를 맞추면 소매가 길었고, 긴 소매를 항상 접어올려 입거나 수선을 해야했다. 바지는 또 어떤가. 키가 작은 J에게 딱 맞는 바지길이란 없었다.
J와 달리 나는 바지 밑단을 거의 수선해본 적이 없었다. 단, 소매의 경우 J의 경우와 반대로 항상 짧았다. 그래서 팔을 어깨높이 정도로 들어올리면 늘 4-5cm 가량 팔목이 드러나곤 했다. 그래도 큰 불편함이 없어 이 또한 수선하는 일 없이 입곤 했다.
다이어트 자극 사진이라는 것이 있다. '워너비 몸매'를 핸드폰 배경화면으로까지 설정해놓고 뭔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들 때, 다이어트에 한계가 올 때마다 보는 사진이다. 자매품으로 '살 빼면 입을 옷'이라는 게 있다. 지금은 입을 수 없지만 다이어트를 성공하고 입을 아주 예쁜 옷을 사고, 그 옷을 보며 지속적으로 다이어트에 동기부여를 하는 방법이다. 즉, '옷에 몸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J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옷에 몸을 맞출 수 있단 말인가. 팔다리를 잡아 땡겨서 늘릴 수도 없고, 반대로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팔다리가 마음대로 늘어났다면 내 꿈은 해적왕이 되었겠지
다이어트도 마찬가지다. 살을 빼서 그 옷에 내 몸을 우겨넣은들, 사람마다 타고난 신체의 특성이 다 다른데 어떻게 워너비 몸매가 내 몸매가 된단 말인가. '난 왜 저런 몸매를 갖지 못할까' 하며 한없이 나 자신을 못 살게 굴 뿐이다.
"난 내 몸의 사이즈가 크니까 나처럼 사이즈 있는 남자를 만날 거야!"
미국 교환학생 중 만난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니 진짜로 비슷한 몸매의 남성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그 때만 해도 연애를 하기 위해서, 혹은 자기관리 차원에서 살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던 내게 생각의 전환을 준 한 마디였다.
세상의 '표준'에 저항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맞출 수 없는 표준에 내 몸을 우겨넣기보다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당하면 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처음 식사한 날, J는 거짓말하기 싫다며 있던 깔창도 빼버리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고 했다. 외모도 생각도 비표준인 J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