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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원샘 Jul 25. 2024

심연이 나를 외면하도록

『반지의 제왕』 속 타락한 마법사, 사루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 니체,『선악의 저편』에서 -


  해석 없이 본질이 드러나는 문장이 있다. 현상을 그대로 옮긴 말들. 이 문장은 실로 그러하다. 반지가 사우론의 사악한 물건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내뿜는 마력에 중간계의 적지 않은 영웅들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절대 반지의 마력은 이렇다. 첫째, 착용자가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기게스의 반지가 떠오른다. 기게스는 보이지 않는 반지로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둘째, 반지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주인, 사우론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호빗』에서 빌보가 절대 반지를 우연히 찾게 되는 대목은, 사실 골룸의 수중에 있던 절대 반지가 우연을 가장하여 벗어난 것이다. 끝으로, 반지는 소유자를 광적으로 매혹한다. 소유자가 꿈꾸는 극한의 미래를 환영 Vision으로 보여준다. 그 욕망이 물질에 충실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깊은 연민이든.


  자세한 얘기에 앞서 톨킨이 창조한 세계관을 잠시 언급하고 싶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과 유사한 존재들이 『반지의 제왕』의 창조 신화 격인,『실마릴리온』에 등장한다. 하늘의 왕 만웨, 물의 군주 울모, 그리고 요정들이 제일 사랑한 별의 여왕, 바르다가 그들이다. 톨킨은 이들을 '발라 Valar'라고 이름 붙였다.『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간달프와 사루만은 사우론에 대항할 수 있도록 발라들이 중간계로 파견한 존재다.


  사루만은 파견된 다섯 마법사 중 하나다. 제일 강력하며, 사우론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백색 의회'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사우론과 '두 개의 탑' 동맹을 맺게 되었는가. 아래와 같다.

 

사루만은 오직 적에 대항하기 위해 훌륭하고 선한 의도로 그것들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엘론드의 경고를 증명하고 만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적의 기술을 깊게 연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오.' (...) 사루만의 깊고 미묘한 지식과 다른 존재를 압도하고픈 마음이 반지에 사로잡히고, 왜곡되어 버린다. (...) 머지않아 그는 또 다른 지배의 반지를 만들고자 했다.
Great and good at first, Saruman intended to learn them only in order to counteract them. But his fate bears out Elronds's warning: 'It is perilous to study too deeply arts of the enemy, for good or ill.' ... Saruman's 'deep and subtle' knowledge and 'power over the minds of others , are appealed to and perverted ... Before long he is trying to forge another ruling ring.
- 『Master of Middle-earth』p. 63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루만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니체의 말대로. 심연을 들여다보니, 심연 역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심연은 자신을 배양할, 타락한 토양을 '잘 안다 Comprehendo'. 흥미로운 점은 니체의 말을 증거 하는 기물이 작중에 또 있다. '팔란티르 Palantir'라고 불리는 천리안 수정구다.


- 영화,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속 사루만. '팔란티르'로 사우론과 '두 개의 탑' 동맹을 맺었다.


  팔란티르는 사우론이 만든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누메노르인(반지의 제왕 이전 시대, 발라의 은총을 받았던 인간)이 중간계에 건국한 '아르노르와 곤도르'는 모르도르를 감시해야 했다. 이를 위해 사용한 고대 요정의 통신 기물이 팔란티르였으며 총 7개였다. 그러나 사우론의 최고 부관, 마술사왕 앙그마르가 미나스 이실을 멸망시킨 후, 획득한 팔란티르를 사우론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사루만은 중간계로 넘어올 당시, 곤도르에게 선사받은 '오르상크 Orthanc' 탑의 팔란티르를 자연스럽게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타락한 후, 팔란티르를 가지고 사우론과 더욱 쉽게 접촉하여 심연을 깊이 들여다본다. 사우론 역시 그를 들여다보고.

- 영화,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속 아이센가드와 오르상크 탑. 사루만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 -


- 영화,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속 오르상크 탑. 전쟁 준비로 아이센가드가 황폐하다. -


  사루만의 성채, 오르상크는 (의도든 우연이든)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정의 언어로 '산 송곳니'를 의미하지만, 오래된 로한의 언어로는 '간사한 마음'을 뜻했다.
  This was Orthanc, the citadel of Saruman, the name of which had (by design or chance) a twofold meanig; for in the Elvish speech Orthanc signifies Mount Fang, but in the language of the Mark of old the Cunning Mind. - J.R.R. 톨킨, 소설『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p. 174 -


  '간사한 마음(오르상크)'에 사는 간사한 마법사. 재밌는 언어유희가 작품 속에 적혀있다. 로한의 언어대로 중간계는 사루만의 간사함으로 고통받는다. 힘 있는 자가 미치면 대지에 깊은 상처를 낸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도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광기로 변한다.


  그러나 욕망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가공할 만한 기물을 이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던가. '절대 반지'와 '팔란티르'를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심연이 나를 쳐다볼 때 그 시선을 거두도록 해야겠다.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애굽에 열 번째 재앙이 떨어진 날, 양의 피를 문에 바르듯이. 또는 어둠이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Ut non tenebrae vos conprehendant. [John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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