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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원샘 Aug 08. 2024

사랑과 증오의 공통성 - 파괴

『변신』과 게임,『발더스 게이트 3』속 이야기

*『변신』과 『발더스 게이트 3』에 관한 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악몽으로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는 잠자는 침대에 누운 자신이 보기에도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닥에 대고 누운 등은 등딱지처럼 딱딱했고,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자 갈색 배가 보였는데, 딱딱한 마디들이 맞물려 활처럼 휘어진 배는 살짝 부풀었다.

- 프란츠 카프카,『변신』 첫대목 -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보이는 것'에 휘둘린다. 그레고르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부모님과 열일곱 살의 여동생은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이 찾아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것이다. 흉측해졌다. 돈줄은 끊겼다. 그레고르가 어떻게 비참하게 죽어가는지 하루면 충분하다. 그리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도 하루면 충분하다.


  사랑과 증오 모두 파괴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서술한 이영도 작가의 통찰은 옳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像 중 받아들이기 힘든 면은 뜯어고치고자 한다. '뜯는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굳혀졌지만, 사랑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파괴'의 모습을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파괴는 창조의 틀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못 견뎌하는 모습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무조건적인 사랑 Agape은 범부가 감당하기에는 그 무게가 상상을 초월한다.


  사실, 바람직한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랑과 우정의 대상이 본인이 기대했던 상像에 어긋나는 순간,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전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버리자 가족과 연결된 유대가 연기처럼 사라지듯이.


  발더란과 안수르. 발더란은 『발더스 게이트 3』의 페이룬 세계의 뛰어난 모험가다. 『발더스 게이트 3』는 21세기 서양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CRPG(Computer Role Playing Game) 게임의 훌륭한 예다. 게임에 등장하는 도시, '발더스 게이트'는 중대한 사건의 무대다. 그런 도시를 세운 이가 바로 발더란이다. 그 곁에 드래곤, 안수르가 함께 했고 그들의 우정은 깊었다.

『발더스 게이트 3』 속 발더스 게이트와 발더란의 동상


  그러던 어느 날, 발더란이 모험에 대한 열정을 삭이질 못하고 향한 '달오름탑 Moon-rise tower'에서 변을 당한다. 달오름탑은 *일리시드의 거점이었고, 발더란은 그들에게 사로잡혀 일리시드가 되고 만다.


*일리시드: 예전부터 서양인들은 문어와 같은 연체동물에 묘한 공포와 혐오감을 느끼는 듯하다. 일리시드라고 불리는 생명체는 뛰어난 지능과 사악한 본성을 바탕으로 엘더 브레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일리시드의 번식 방식은 '일리시드 올챙이'로 숙주를 감염시키면, 숙주는 수일 내로 일리시드로 탈바꿈한다.

염력과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생명체인 만큼, TRPG로 서사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 이 생명체를 차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곤 했다.
『발더스 게이트 3』일리시드가 '올챙이'를 가지고 숙주를 감염시키는 장면


  발더란을 수소문하던 안수르는 마침내 일리시드가 된 발더란을 찾아내고, 임시방편으로 엘더브레인의 지배로부터 그를 구출해 낸다. 그리고 여러 방도를 모색하여 그를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했으나 소용없었다.

일리시드가 된 발더란
구출한 발더란을 치료하고자 노력하는 안수르


  흥미로운 것은 발더란의 반응이다. 그는 일리시드가 된 자신을 병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리시드가 가진 능력과 잠재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안수르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발더란의 말에 따르면 안수르는 자신에게서 오직 사악한 생명체, '일리시드'만을 보았다고 전한다. 이에 안수르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발더란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괴물이 된 친구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


  결심한 그날, 안수르는 눈물을 삼키며 발더란에게 다가온다. 발더란은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다. 그러나 발더란의 생존 본능은 안수르를 죽이고, 그를 발더스 게이트 지하, 숨겨진 성소에 둔다. 친구에게 살해당한 슬픔과 분노로 인해 안수르는 언데드 상태로 부활하여 발더란을 공격하지만, 모험가 User는 안수르의 영면을 돕는다. 그리고 그의 품에 있던 쪽지 하나.

죽은 안수르
죽은 안수르 품에 있던 쪽지 하나

안수르에게     


이미 천 번은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겠네. 치료법은 없어. 하지만 괜찮네. 나는 괜찮아. 아니, 괜찮은 것 이상이지. 난 그 어느 때보다 좋아. 그런데 왜 자네는 그리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물론, 그 이유를 짐작은 하네. (...)    

 

자네는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네, 안수르. 난 자네에게 무엇도 바란 적이 없어.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부탁하겠네. 그만 멈추라고. 나는 이제 나의 감정을 알지 못하지만, 자네의 고통은 느낄 수 있네. 꼭 이렇게 될 필요는 없어. 자유를 얻게, 안수르. 날아가게. 그리고 기억해 주게. 내가 자네 곁에 없더라도, 난 언제나 자네의 발더란이란 것을.

- 『발더스 게이트 3』속 안수르의 품에 있던 쪽지 -


  안수르의 품에 있던 쪽지가 나로 하여금 슬픔에 침잠토록 했다. 사랑만큼 진한 우정이 그 둘 사이를 파멸로 이끌었다. 종말 속에서도 아끼는 이의 흔적을 고이 간직했다. 사랑하는 이가 괴물이 되었어도 그대로 봐줄 이가 몇이나 될까. 우리 모두 부처였다면 세상의 고뇌는 진작에 사라졌을 테다. 그러나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기에 이상理想에 집착하는 것이겠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뜨거운 것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이 뜨거움은 물리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며, 바라면 바랄수룩 걷잡을 수 없이 손을 태운다. 바라서 되는 것과 어쩔 수 없음을 구별하는 지혜. 사랑은 이 지혜와 함께여야 비로소 비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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