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책이 읽히지 않는 사회

by 호원샘

(...) 무한은 전진progressio하며 인간적 얼굴을 버린다. 유한을 파괴하며 현재 위를 한 발 한 발 진보한다.

지난 세기 전쟁을 고안한 세계 산업화, 그 죽음의 세계, 산업화는 지상의 진보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실은, 폐허로 한 발 한 발.

대림待臨이 있을지어다. 불탄 인간 냄새를 피우며.

- 파스칼 키냐르(류재화 옮김), '심연들', 문학과 지성사(2002) p. 72 -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은 핵전쟁 이후 처참해진 인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야기다. 리보위츠는 핵을 개발한 기술자 중 하나다. 세상이 핵전쟁으로 황폐화되고 수많은 생명이 들판에 죽어나가자, 생존자들은 무기를 만든 과학자, 기술자, 지식인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 윌터 M. 밀러 Jr.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제1권 p. 104 -

그리하여 정치인, 과학자, 기술자, 교사들이 지구를 망친 죄 때문에 처형됐다. '피에 굶주린 바보들'. 미친 군중들을 향한 지식인들의 비판은 그들로 하여금 즐겁게 악을 행하게 했다. "(...) 우리는 바보끼리 마을을 세우고 그 마을 이름을 바보 마을이라고 짓겠다. 왜냐하면 그때 이 모든 불행을 자초한 똑똑한 개자식들은 모두 죽었을 테니까! 바보들아! 자, 가자! 이것을 그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단 말이야! 이 중에 바보가 아닌 사람이 있나? 있다면 그 개자식을 잡아 오라!"(p. 105)


리보위츠를 비롯한 기술자와 지식인들은 이들의 광기를 피해 수도원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수사의 복장을 하며 과거로부터 전승된 지식과 책을 보존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수도원마저 공격하게 되고, 수많은 책들이 분서된다. 리보위츠 역시 광기에 처참하게 희생된다. 소설은 리보위츠의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리보위츠 교단' 소속의 한 수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와 같이 먼 미래를 다룬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가공할만한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의 파멸과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데 있다. 그 징조 중 하나는 '책'을 경시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가 대표적이다. 파리와 모기는 박멸되고, 쾌적한 사회를 위해 인공수정으로 인구를 효율적으로 조율한다. 그러나 그들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 기분이 안 좋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면 그뿐이다. 상층 계급은 소마를 쉽게 접하고 복용하며, 하층 계급은 이 소마를 배급받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선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Fahrenheit 451)'도 궤를 같이 한다. 그의 소설에는 방화수Fireman라는 직업이 존재한다. 불편한 것을 불태운다. 책을 태운다. 집에 책이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불편하게 질문 따위 하는 인간은 멸시당해 마땅한 사회를 그려낸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멋진 신세계' 그리고 '화씨 451' 모두 과학으로 '진보'된 미래에 책이 분서되고 읽히지 않는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냈다.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편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이 편안함과 발전이 동시에 우리의 인간성마저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의 발전과 보급은 생활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마주 보지 않더라도 많은 것을 행한다. 쉽게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빠르게 스크롤할수록 뇌는 즐거움을 느낀다. 인내의 역치가 낮아진다. 쉽게 화내고 분노한다. 더한 자극을 찾는다.


리보위츠가 겪은 비극, '멋진 신세계'의 뒤틀린 자본주의와 전체주의는 인간의 우선 가치가 전도된 것을 방증한다. 물질가치가 부조리하게 우선될 때 인간들은 잔혹해진다. 잔혹함이 만연하는 시대의 기미로서 책은 읽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서는 더디고 느리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정, 정의 그리고 평화와 같은 가치들은 인간에게 깊은 인내심과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탐욕과 생존 경쟁으로 변질된 물질사회에서는 쾌락과 본능이 즉각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인내심을 기르는 과정은 사치다. 독서를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독서와 윤리적 가치를 연관 짓는 것에 비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형식과 본질이 상호작용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이 흐를 때 길을 내지만, 역으로 정해진 길에 따라 물이 흐르기도 한다. 둘째, '상징Symbol'이 주는 마력이 있다. 상징은 대상들을 중첩한다. 나라의 국기가 대표적이다. 한 나라의 국기를 태우는 행위는 개인의 일로 치부하기에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책은 인간의 고유한 산물이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다. 음양오행에서 인간을 나무木에 비유한다. 책이 무분별하게 분서되는 것은 인간이 태워지는 것과 형상이 비슷하다.


세 작품에서 만난 디스토피아들이 그려낸 공통된 특징이 우연하게도 동일했다.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연은 주술적인 힘이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의 힘을 실감한다. 두 작품만 그러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 번째 디스토피아에서의 분서. 세 번째로 말미암아 '분서'는 디스토피아의 자명한 특징으로 나에게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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