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시작
여행은 책갈피와 같다. 시간의 귀퉁이를 접어둔 것처럼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새겨진다. 아주 작은 단서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그곳으로 소환되는 기분이다. 방 청소를 하느라 현지에서 사온 기념품을 정리하다보면 그대로 주저앉아 그때의 날들을 곱씹어보곤 한다.
보통의 여행 기념품은 아기자기한 장식품이지만 인도여행은 책장에 꽂힌 노트 한 권으로 남았다. 워낙 이동시간이 길다보니 중간중간 떠오른 상념들을 저녁마다 침대에 앉아 일기처럼 썼다. 첫 날에는 여행사에서 나눠 준 일주일의 경로와 각 유적지의 특징을 공부하듯 정리하기도 했다. 평생 한번이라도 다녀올까 말까한 장소이기에 사진으로 담지 못하는 감상을 기록하고 싶어 잠들기 전 생생한 하루를 기록해 두었다.
사실 인도는 기피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대학시절 야간열차를 타고 다니며 온갖 벌레때문에 고생했다는 어느 선배의 경험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던 탓이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예상치못한 우연이 운명처럼 찾아올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인도가 그랬다. 불교 유적을 테마로 하는 순례길 여행이란 말에 덜컥 신청을 해 버렸다. 그렇게 8시간에 걸친 델리행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낯선 환경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 온다. 우리와 180도 다른 인도에서 어느 때보다 오감이 예민해졌다. 매 끼니마진한 짜이티와 파파야, 향신료 가득한 커리와 같은 이국적 음식이 테이블을 채웠고, 길거리엔 형형색색의 전통 문양들이 가득했다. 주로 버스로 이동 했기에 창을 사이에 두고 이방인과 현지인의 눈길이 마주쳤는데, 나만큼 그들도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 보았다. 우리는 성지순례라는 테마에 맞춰 인도의 동과 서를 가로질렀다.
우리가 방문한 곳 대부분은 외곽은 시골 마을이다. 갠지스강을 제외하고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어딜가나 줄을 서야했다. 의외의 풍경이었다. 주변을 걷거나,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섞여 저마다 여행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불교가 번성한 아시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았는데 서양 사람들도 절반은 되어 보였다. 이동수단도 그렇고, 숙박시설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불교 유적지는 석가모니의 발자취이다. 그가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하고 마지막 죽음에 이른 장소를 다닌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인생의 반환점을 짚으며 다닌다. 한 사람의 인생길 쫓아 다니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나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태어남과 죽음,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멤돌았다.
여행을 하며 유적지를 쫓아다니는 과정이 마치 삶을 여행가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부러운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명확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사회에 기여 했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기위해 도전한 사람,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한 한 인간으로서 영감을 주었다. ‘너는 어떤 삶을 바라니?’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물음표의 방향이 나에게로 향했다. 순례길이란 이름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내 삶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공자는 30세를 일컬어 이립(而立), 스스로 뜻을 세우고 중심을 잡는 나이라고 했다. 10대와 20대는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막 사회에 나와 적응하는 시기이다. 그러다 30대가 되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사회에 자리를 잡으면서 현재를 돌아보게 된다. 인생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넘어, 방향과 깊이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 때 외부의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욕망을 찾고 싶어진다. 프랑스 사상가가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고 한 것처럼 스스로 질문을 마주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걸 떠올리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종종 이정표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생각할 기회를 갖기 위해 방법 중 하나로 글 쓰기도 시작했다. 이때 썼던 노트 찾아보면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질문들과 대답이 빼곡히 써 있다. 버킷리스트와 같이 막연히 해보고 싶은 일과 여행지를 쓰거나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묘사해본다. 매번 쓸 때마다 바뀌는 것들도 있고, 비슷하게 반복되는 소망도 있다. 이렇게 계속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형태를 다듬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