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정 Oct 20. 2021

사랑하는 대상을 기록한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프랑스 철학자

 

가을은 하루가 마냥 아깝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맑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는 최고층이라 창밖으로 남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침이면 이부자리를 털고 나와 그날의 날씨를 가늠해 봅니다. 요즘은 창을 액자 삼아 눈앞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봄과 가을에는 매일 자연에게서 선물을 받는 기분입니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9월은 생일이 있는 달. 세상에 태어나 이맘때 풍경을 처음으로 보았겠다, 생각하며 자주 걷습니다. 마치 처음 이 가을을 맞이한 것처럼요.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는 내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날, 모든 날이 고유한 날이니까요.


눈부시게 선명한 가을을 담아보려 핸드폰 카메라를 켭니다. 역시나 내가 보고 느끼는 만큼 화면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공기의 쾌청함과 푸르름, 그리고 나만이 느끼는 계절의 향기는 글로만 담을 수 있습니다. 문자 자체는 무미건조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이미지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하늘하늘한 코스모스'라는 두 단어로 저마다의 가을이 그려집니다. 코스모스가 부드러운 바람이 일렁이는 한적한 시골길이 떠오르는 것처럼, 단어가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여러 이미지와 감각이 연상됩니다.


어쩌면 사진보다 더욱 생생한 기억의 저장이 글입니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일상의 순간이 문자를 통해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집니다. 그래서 글로 쓴다는 것은 대단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반대로 글로 씀으로 해서 그 대상이 소중해지기도 합니다. 


가끔 일기장을 펼쳐볼 때가 있습니다. 특별할 거 없이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는 얘기부터, 체중관리를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는 시시콜콜한 사연들까지...   그맘때의 생생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물론 일이 꼬이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한 흔적들도 있습니다. 항상 좋은 날만 기대할 수는 없겠죠. 결국 궂은날도 맑은 날도 하나같이 나의 삶을 만드는 소중한 시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 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많은 길을 돌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우회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헤매는 것 같아 보여도 목적지에 도달해서 보면 그 길이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


예전에도, 지금도, 평범한 날들을 기록합니다. 아무 일 없는 날은 별일 없이 지나서 다행이고, 속 태우는 일은 밖으로 털어놓으면서 해소합니다. 만약 우중충한 일과를 보냈다 해도 방법은 있습니다. 강연이나 책 속에서 힘이 되는  한 구절을 따라 쓰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런 사소한 노력들이 마음의 연료를 채워줍니다. 


평범한 하루의 끝에는 단 한 줄이라도 그날의 좋았던 것을 기록하는 연습을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소중한 것들도 금방 잊힐 테니까요. 가끔은 길을 잃은 것 같아도 언젠가는 이 길이 유일한 지름길이라는 믿으며, 매일 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전 05화 내가 읽은 책이 나를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