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분식집2
환은 연아와 아이들을 먼저 주막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돌아와서 고추상인의 장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 그 많던 고추를 다 팔았잖아?"
환의 말대로였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고추는 물론, 고춧가루마저도 남김없이 모두 팔아치운 고추상인.
마지막 손님에게 고춧가루를 건넨 그는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켜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과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어! 오늘도 다 팔았군 다 팔았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아이고! 이 사람아 그런 말 말어! 사람들이 우리 집 고추를 좋아해 주니 다행인 것이지... 대단할 것 하나도 없어!"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일까? 그러기엔 조금 젊어 보이는 데...'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환은 우선 고추상인에게 가보기로 했다.
"저기..."
"응? 무슨 일 이슈?"
환이 말을 걸자 대답을 하는 고추상인.
하지만 환이 말을 건 상대는 고추상인이 아닌 그의 뒤에 있는 선비였다.
그 선비는 고추상인이 열심히 고추를 판매할 동안 그의 바로 옆에 서있던 것으로 보아, 그의 동업자인 듯 보였다.
"저기... 상인님 말고 그 뒤에 계신 선비님..."
그러자 선비가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을 쳐다보았다.
"나... 를 말하는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대체 뉘신대 내게 볼일이 있다는 것인지...? 난 그쪽 도령에 대해 일면식도 없습니다만..."
선비의 말에 환 또한 조금 놀랐다.
'정말 날 못 알아보는 눈치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환은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저 <남매 분식집>의 <환>입니다."
"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저 환이라고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온 김환이요!"
".........."
환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는 정말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저 얼굴은 연기도 무엇도 아니야... 날 정말 모르고,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듣는 얼굴이다..."
"미안하오만... 난 그쪽 도령이 하는 이야기를 전혀 못 알아듣겠소! 무슨... <분식> 어쩌고... <대한> 어쩌고... 내 무슨 답을 주고 싶어도 도통 모르는 이야기 투성이라..."
"아...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괘념치 마시오!"
"죄송합니다."
환은 선비에게 고개 숙여 사죄의 인사를 했다.
"하하하... 괜찮다니까... 그럼 난 바쁜 일이 있어서 가 볼 테니, 언제 기회가 된다면 또 봅시다."
"네!"
그렇게 허무하게 자리를 뜨는 선비를 바라보며 환은 복잡한 심정에 휩싸였다.
'이상하다... 저렇게나 닮았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니...'
'그저 닮은 사람인 건가?'
'하긴... 그럴 가능성도 있지! 내가 지금 조선에 와있는데... 무슨 일이 못 일어나겠어?"
환은 대신 본래의 목적대로 고추에 대해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고추상인을 찾았다.
고추상인은 마침 정리를 다 끝내고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제가 몇 가지 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뭐... 뭔데 그러슈?"
"혹시 방금 가신 선비님을 알고 계신가요? 두 분이 동업... 하시는 것 같던데..."
"어이구! 이 사람! 동업이라니!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슈!"
"네? 동업이 왜요?"
"그분은 양반이고, 나는 상민인데 동업이라니!"
"아... 계속 옆에 계시기에 전 그만 동업자인 줄..."
"그건... 그분이 우리 농사를 다 돌봐주고 계시니까 그런 것이고!"
"네? 농사를... 돌봐주신다고요?"
"그렇지! 그분의 집안이 안 계셨으면, 우리 농사는... 아휴! 생각도 할 수 없지! 암!"
'무슨 뜻이지...?'
그때 고추상인의 동료인 듯한 사람들이 그를 불렀다.
"아 이 사람아! 날 저무는데 어서 가야지!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 그려! 가야지!"
"아무튼... 내가 지금 좀 바쁘니... 이만 가봐야겠수!"
"아...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고추 농사는 언제부터 지으셨습니까?"
"언제부터고 뭐고, 난 우리 아버지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지었으니께..."
"그... 그렇군요..."
"혹시 궁금한 것이 있거든 내일 다시 찾아오슈! 난 여기서 계속 장사하니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 가요!"
환은 그렇게 떠나가는 고추상인 일행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농업이 크게 발달한 조선과 고추... 그리고 상민의 농사를 돌봐주는 양반이라..."
"분명 무언가 있는데... 그게 뭘까?"
고추상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환도 주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
그날 저녁.
환의 일행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막에,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뭐야? 누구지?"
방에서 이 소리를 들은 연아는 귀찮은 듯 정훈을 불렀다.
"정훈아! 정훈아! 손님이 오신 듯한데, 네가 나가서 다음에 오시라고 전해라."
"알았어 누님!"
"저게... 또 누님이라고!"
평상에서 환과 재료를 다듬던 정훈이 연아의 말을 듣고 일어나 주막 입구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낯선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우리 주막은 지금 객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곧 다시 영업을 재개할 것이니, 그때 다시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낯선 남자 중 하나가 정훈의 말에 답을 했다.
"주막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슈!"
"그럼 어째서..."
"가서 이렇게 전해 주슈! 분식집 김환 도령을 찾아왔다고!"
"예... 예예..."
평상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환은 깜짝 놀라 입구로 뛰어갔다.
"앗! 다... 당신들은?"
환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낮에 보았던 고추상인과 선비였다.
"하하하! 뭘 그리 놀라고 그러시오!"
"아니... 어떻게 여길...?"
"지금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주막인데, 우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우...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세 사람은 주막 안으로 들어와 평상에 앉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주막을 찾는 이유는 뻔하지 않겠소! 우리도, 소문난 볶음밥을 먹으러 왔습니다."
"네? 볶음밥... 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대신, 우리에겐 조금 다른 볶음밥을 해주시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보게! 그걸 내어드리게!"
"예! 나으리!"
선비의 명에 따라 고추장사가 가져온 작은 보따리를 환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신김치입니다!"
"네?"
"내 마침 신김치도 가지고 왔으니, 그 김치로 김치볶음밥을 좀 부탁하오!"
선비의 말에 깜짝 놀란 환!
"아니... 그... 그걸 어떻게?"
"하하하! 뭘 그리 놀라고 그러시오!"
"내가 이 김환 도령의 볶음밥을 먹을 생각에 아까부터 쫄쫄 굶다가 왔소! 그래서 배가 너무 고프니... 우선 밥을 좀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예... 예! 알겠습니다!"
"우리 집 김치가 한양에서도 아주 소문난 김치라서 맛이 아주 좋을 거요!"
환은 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지만, 일단 그의 요청대로 김치볶음밥을 만들기로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래! 우선, 요리에 집중하자!"
부엌에 온 환은 고추상인이 건네준 보따리를 먼저 풀어 보았다.
그 안에는 나무로 된 고급스러운 찬합이 있었고,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빨간 포기김치가 들어 있었다.
환은 김치 한쪽을 주욱 찢어 입에 넣어보았다.
"뭐야? 무슨 김치가 이렇게 맛있어?"
그 맛에 깜짝 놀란 환.
"게다가... 시원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환은 김치를 맛본 후 확신이 들었다.
'이 김치... 그리고 김치볶음밥... 저 선비님은 틀림없이 나와 연결된 그 어떤 비밀을 알고 있어!"
그런 확신이 든 환은 그에게 비밀을 듣는 길은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김치를 가지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여기선 그걸 써볼까?"
환은 주막 한편에 놓여 있던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항아리의 뚜껑을 여니 안에는 뽀얀 흰색의 반고체 물질(?)이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이건 뭡니까 사부?"
이를 지켜보던 정훈이 궁금함을 못 참고 환에게 물었다.
"아... 정훈이 넌 처음 보려나? 이건 돼지기름(라드)이다."
"예? 돼지... 기름이라고요? 돼지기름이 왜..."
"그래! 이 기름이 앞으로 우리 분식집 요리의 핵심이 될 거다!"
"예..."
"하하하! 뭐... 보면 알 거야!"
환은 뒤집어진 솥뚜껑 위에 굳은 돼지기름을 넣었다.
그러자 솥뚜껑이 달궈지면서 반고체의 돼지기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노란 기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와!"
"여기에 파를 넣어 향을 더하고..."
- 치이익 -
"거기다 잘게 썬 돼지고기를 넣은 뒤 함께 볶다가, 잠시 후 선비님의 김치를 넣고..."
- 촤아악 -
"여기에 감칠맛을 끌어낼 김치 국물과 소금, 그리고 조청을 적당히 넣어 간을 하고..."
"마지막으로 밥을 넣고 함께 볶는다."
환의 손에 의해 맛있게 완성되어가는 김치볶음밥!
"정훈아! 넌 계란을 부쳐라!"
"예! 사부."
- 치잇~ 지글지글 -
마지막으로, 접시에 담아낸 김치볶음밥 위에 정훈이가 부친 반숙 계란 프라이를 얹은 뒤, 깨를 뿌리면 완성!
"이것이 바로 우리 분식집 특제 김치볶음밥이다!"
"우와아! 정말 맛있어 보입니다 사부!"
완성된 김치볶음밥을 본 정훈이 감탄하며 환에게 말했다.
"하하하! 녀석! 넉넉히 만들었으니... 우선 손님들 상에 먼저 내어 가거라."
"예 사부!"
그렇게 완성된 김치볶음밥을, 정훈이 선비 일행에게 내어가자, 선비와 고추상인은 탄성을 질렀다.
"오오!"
"아니! 이것이 대체 뭔 밥이래요?"
"이건 김치볶음밥이라고 하는 음식이다."
"예?"
"허... 이리 맛있어 보이다니..."
"아휴! 냄새가... 냄새가 아주 환장하겄습니다요."
"그러게 말이다! 우선 맛을 보자꾸나! 이 냄새를 맡으니 정신까지 아찔해지는 것 같다."
"네!"
선비는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도, 아주 능숙하게 김치볶음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선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밥에 스며들게 한 뒤 이를 흰자와 함께 떠먹는 노련함.
"으음..."
"이 맛이었구나! 이 맛이었어!"
"아이고 무슨 밥이 이래 맛있대요? 이런 맛있는 밥... 소인은 처음 먹어봅니다요."
"그렇겠지! 나도 그러하니 말이다!"
"하지만, 앞으론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네?"
"하하하! 그리 알고 우선 먹자꾸나!"
"예! 나으리!"
환은 부엌 앞에 서서 그런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김치볶음밥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먹는 방법이 능숙해?'
'노른자를 터트려 흰자와 함께 맛있게 먹는 방법도 잘 알고 있고...'
'누굴까?'
그 사이 식사를 끝낸 선비 일행!
어찌나 맛있었는지, 정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김치볶음밥을 먹어치웠다.
"어험험! 으흠! 정말 맛있게 먹었소!"
"맛있게 드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자... 그럼 식사도 마쳤으니, 약속대로 김환 도령은 나하고 잠시 이야기를 합시다."
"네!"
"잠시 방을 빌려도 되겠소?"
"네!"
그런 그들을 따라가는 연아.
하지만 이내 선비에게 저지당했다.
"낭자! 미안하오만... 단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예? 끄응... 예..."
"대신 이야기가 잘 풀리면 낭자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잠시만 이해를 부탁하오."
"예..."
방안으로 함께 들어간 선비와 환.
둘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대체 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