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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May 22. 2024

저마다의 고달픔이 서로의 어깨를 넘나들었다.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제법 능숙한 솜씨로 해종이 배추 전을 굽는 동안 현이 골뱅이를 무치고 소면 사리도 만들었다. 현은 해종의 주방이 익숙한 듯 묻지도 않고 주방용품들을 척척 꺼내 썼다. 수찬은 땅콩과 오징어, 귤을 접시에 담았고, 연재는 휴대용 인덕션을 작업대 위에 놓고 어묵전골을 끓였다. 말 한마디가 불러온 나비효과. 이럴 거면 식당에 갈 걸, 후회조차 이미 갠지스강을 건너갔다. 순식간에 각자 만든 음식을 작업대 위에 올리고 둘러앉았다. 넷이 모여 있으니 무슨 어벤저스라도 되는 것 같다며 수찬이 웃는다.    


연재가 앞접시에 어묵전골을 담아 각자에게 돌렸다. 골뱅이 소면을 배추 전에 싸서 먹으면 맛있다고 현이 추천했다. 다들 그렇게 먹어보고 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뜨끈한 국물까지 한 숟갈 뜨면 맛의 조화가 완벽했다. 수찬이 소맥을 말아 돌렸고, 다들 잔을 받아 “짠!”도 한 번 했다. 그러다 갑자기 현이


“근데 사장님은 여기 웬일이세요?” 인제 와서 궁금했나 보다.

연재는 이 복잡다단한 사건의 시발점을 어떻게 한마디로 요약할까? 싶었는데

해종이 만두가 그려진 검은 쟁반을 들며

“연재 씨가 여기에 만두를 주셨는데, 내가 그때 배추 전을 부치겠다고 했거든.”

“사장님이 형한테 만두를 만들어줬어요?” 의외라는 듯 현이 연재를 봤다.

“그때 그림 옮겨주시고 직접 설치까지 해주셨잖아. 돈은 안 받으시겠다고 해서”

“아….” 현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이다. 연재는 사실을 말했는데 변명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수찬이 쟁반을 들고 보며

“와, 이걸 여기 그리신 거예요? 왜요?”

해종은 전시는 어떠냐며 말을 돌렸다. 수찬은 생각보다 많은 손님 덕에 소풍에 알바로 취직했다며 음악 해서 먹고살기 어려워서 진심으로 음악을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말이 고팠는지, 주사가 수다인 건지 수찬은 계속 말을 쏟아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돈은 못 벌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낭만이 있어 견딜만했는데, 서른 중반을 넘고 나니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걱정이란다. 연주해 오던 클럽에서도 젊은 피 수혈한다고 기존 연주자들을 모두 물갈이하는 바람에 연주할 곳도 사라져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워야 하나 싶은데, 음악 말고는 해 본 게 없어서 무슨 기술을 배울지도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여자친구랑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진 이야기, 잘 나가는 동료 음악가들 이야기, 일본에서 밴드로 활동했던 이야기 하느라 목에 핏대가 섰다. 이미 현과 전작이 있어 취기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말하는 동안 계속 소맥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벌써 많이 취한 것 같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찬의 말에 위로와 공감을 보내는데, 취한 탓인지 그동안 너무 힘든 탓인지 수찬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나이에 알바자리 알아보려고 전전하는 자신이 비참하다고 했다. 한(恨) 민족이 맞다. 월급이 많지 않더라도 꼬박꼬박 일정한 금액이 들어오는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물었다. 해종이 말없이 수찬의 어깨를 토닥였다. 해종의 토닥임에 수찬은      

“저요,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요? 기타 친다고 하면 사람들은 제가 놀고먹는 베짱이인 줄 알아요. 근데 저 손에 굳은살 배도록 맨날 연습하고 작곡하고 편곡하고 레슨하고 그렇거든요? 그리고 베짱이는요 한철 살아요! 겨울에는 다 죽어요! 그 동화가 잘못된 거예요!!!”     


돌연 한 철만 사는 베짱이가 불쌍하다고, 게으름뱅이로 오해받는 베짱이가 불쌍하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형, 취했어. 술만 먹지 말고 안주랑 국물도 먹어!” 현이 수찬의 입에 어묵을 넣어준다.

수찬이 현이 넣어준 어묵을 받아먹고 갑자기 행복한 얼굴로 현의 얼굴을 만지며

“내가 너처럼만 생겼어도 케이팝을 이끌었을 텐데, 나랑 얼굴 바꾸자” 혀 꼬부라진 소리다.

“지금도 훌륭해! 남자답게 잘생겼구먼!” 해종이 수찬을 위로하는 동안

“... 나도 진짜 바꾸고 싶다.” 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세 한탄하는 수찬도, 그를 위로하는 해종도, 자신을 진짜 바꾸고 싶은 현도, 저마다의 고달픔이 서로의 어깨를 넘나들고 있었다. 현이 일어나 수찬을 일으켰다. 취한 수찬을 집까지 바래다준다며 해종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택시가 도착했고 현과 해종이 엿가락처럼 늘어진 수찬을 부축해 나갔다.  

작업실이 엉망이 됐다. 여러 개의 앞접시, 술잔, 물 컵, 전골냄비, 접시, 음식 흘린 자국들.

연재가 앞접시들을 정리하는데 해종이 들어왔다. 괜히 일이 커진 것 같아 미안한데 해종은 연재를 바래다준다며 외투를 집었다. 연재가 같이 정리하고 가겠다고 했지만, 해종은 나중에 천천히 치우겠다며 나가자고 한다.  차가운 밤바람에 정신이 났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마신 탓인지 살짝 취기가 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엔 어색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괜너괜’ 팔려서 아쉬워요?” 해종이 먼저 말을 건넸다.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난 아쉽던데” 뜻밖의 대답에 연재가 해종을 보자

“연재 씨가 좋아했잖아요, 그 그림”

“좋다고 다 가질 수 있나요?”

“... ”

연재는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갖지 못하는 게 왜 해종이 아쉽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의 개똥철학 연장선에서 생각해 보면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일 수 있으니까. 대신 들고 있는 에코백 속 물건을 보며

“이거 고마워요, 잘 쓸게요. 너무 이뻐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문맥 없이 현이 괜찮을 거라고 했다. 연재는 그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느라 필름을 되돌려 봤다. 현이 어두워 보였고, 그런 현이 신경 쓰여 자꾸 눈치를 살폈는데, 이를 해종이 봤던 것 같다. 해종이 현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하의 공동 화장대를 같이 만든 걸 보면 꽤 오랜 시간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그러니 현이 뭔가를 말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수능 국어 킬러 문항을 푼 것 같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재는 자신이 국어 선생님이었기에 이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있는데 해종은 또 행간을 살펴야 하는 말을 던졌다. ‘좋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대단한 사람인지는 몰랐다’라는 말. 술기운도 올라오는데 킬러 문항 두 개를 연속해서 풀려니 머리에 쥐가 났다. 그래서 아니라는 듯,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갑자기 해종이 삶아서 들고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이 떠올랐다. 사실 누구에게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본 적 없기에 순간 어색했다. 컵 하나 삶는 게 무슨 극진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포트의 끓는 물을 붓기만 해도 데워지는 컵을 일부러 삶기란 수고로운 일이다. 그건 단순히 컵을 데워주겠다는 것을 넘어 세균 하나 없는 말끔한 잔으로 주겠다는 뜻이니까 극진한 거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었는데, 어색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일회용 쟁반에 담아준 만두의 의미까지 알아챈 그가, 현을 보는 연재의 눈빛에서 걱정을 느낀 그가, 순간 연재의 어색함을 놓쳤을 리 없다. 머뭇거리는 사이 집 앞에 도착했다. 해종은 조심히 들어가라며 먼저 돌아섰다. 연재가 그의 등에 대고

“아까는 고마웠어요”

해종이 돌아봤다.

“그 컵이요. 삶아주신 거. 배추 전도 맛있었고요.”

해종은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해종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연재도 소풍 안으로 들어섰다. 연재가 계단을 다 오를 무렵, 해종이 크게 소리쳤다.     

“나도 고마워요, 오늘 들러줘서.

연재 씨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연재 씨를 보러 오진 못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얼결에 나온 말인 걸 알지만 배추 전 얘기 꺼내준 것도 고맙고….

잘 자요”


세상에…. 테스토스테론이 가득 찬 커다란 목소리로 ‘잘 자요’ 라니. 성시경도 울고 갈 목소리다. 연재는 오글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에 집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동안까지도 잘 자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해도 아니고 잘 자란 말이 왜 그렇게 남사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잘 자란 말을 육성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밤늦게 문자를 주고받다가 문자로 잘 자란 말은 흔하게 하는데, 말로 들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네 시가 막 넘고 있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여섯 시가 다가오자 벌떡 일어나 운동복을 입었다. 모처럼 새벽 조깅을 하고 싶다. 작년 늦가을까진 새벽 조깅을 자주 했었는데, 겨울이 시작되고부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새해가 밝고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2월 첫 주가 지나가니 이제라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아직 어둡고 무엇보다도 몹시 추웠다. 이 추운 새벽에도 뛰는 사람이 있었다.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해 등에 열기가 느껴질 때쯤 등을 펴고 달렸다. 달리다 보니 콧등까지 올린 목 워머가 답답해 아래로 끌어내렸다. 안을 덥고 겉은 차고, 뜨거운 사우나에서 냉탕으로 옮겨갔을 때 느낌이 났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더는 달리기 힘들어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걸었다. 숨을 고르며 호수를 반 정도 돌았을 때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호흡이 정리되자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데, 누군가 연재 앞을 확 스쳐 지나가더니 뒤돌아 연재를 보며 뒤로 뛴다. 현이다.


 “사장님?” 현이 뒤로 뛰며 반가운 얼굴로 묻기에, 연재도 다시 서서히 달리며

“어? 웬일이야?” 현이 연재 옆으로 와 나란히 달리며

“기분이 계속 가라앉는 것 같아 일부러 나왔어요. 가만있으면 더 가라앉으니까요”

“잘했네. 듬직하다 우리 부매니저!”

“사장님이 다 알고도 받아 주셨는데, 저도 노력해야죠. 저 그럼, 먼저 갈 테니 천천히 뛰세요” 현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가더니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하!”하며 다시 달려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왜 다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기승전결 설명 없이 자기 할 말만 한다. 해종이 그러한 거처럼.     


                                   *

엊그제 시작한 전시가 벌써 마지막 날을 남겨 두었다. 놀랍게도 작품 두 점이 더 팔렸고 수업에 참여하는 수강생도 늘고 새로운 수업 문의도 들어와 연재는 일에 대해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윤희 전시가 끝나면 일주일 동안 사진전이 열린다. 윤희 작가처럼 기획 전시는 아니고 지역 사진작가가 춘하 시의 사계절을 찍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대관한 대관 전시다. 윤희 작가의 작품을 돌려주고 다음 전시까지 준비기간으로 일주일 기간을 뒀다.      


오늘은 팔린 작품을 결재하는 날이다. 갤러리처럼 반반 수익을 나누는 계약이 아니므로 윤희가 핸드폰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사업자 카드단말기를 가져왔고, 전시가 끝날 시간에 두 명의 구매자가 전시장을 방문해 결재를 마쳤다. 혜진과 남편은 조금 늦는대서 연재와 윤희가 작품 철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혜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희가 해종에게 철거를 도와 달라고 요청해 전시가 끝난 다음 날 해종이 그때처럼 트럭을 몰고 와 작품을 옮겨주기로 했다. 윤희는 생각지 않게 두 달 사이 세 점의 그림이 팔려 적잖은 수입이 생겼고, 이에 연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작은 소품 액자 하나를 챙겨 왔다.

    

화가들이 보통 예술 작품의 대중화를 위해 일 년에 한 번, 플리마켓 형식으로 십만 원 단위의 소품들을 내놓는데, 그때 내놓으려고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엽서보다 조금 큰, 그러나 매우 아름다운 안개꽃 그림이다. 연재가 진짜 받아도 되는지 묻자, 윤희는 내년에도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확실히 연재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거다.     

좋아서 연재 입이 찢어질 무렵 혜진이 남편과 나타났다. 혜진은 늦어서 미안하다며 입구에서부터 허릴 숙이고 들어왔다. 연달아 혜진 남편이 시우를 안고 들어왔다. 윤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남편은 신용카드를 내밀며 오늘 작품을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다. 연재는 죄송하지만, 내일까진 전시해야 하니 전시가 끝나면 집까지 작품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세 건의 계약을 연달아하느라 힘들었는지 윤희는 피곤해 보였다. 결재를 마친 혜진과 남편이 다시 그림을 보겠다며 전시장으로 들어가고, 윤희는 먼저 자릴 떴다.    

 

연재는 윤희가 준 그림을 봤다. 크기가 작아도 안갯속 안개꽃은 충분히 신비로웠다. 작품 감상을 마친 혜진과 남편이 전시실을 나왔다. 연재가 작품 배달을 위해 혜진의 집 주소를 물었고, 혜진은 남편 퇴근하면 자기가 와서 가져가겠다고 했다. 혜진은 안개꽃 액자를 든 연재보다 훨씬 더 신나 보였다.      


이제 연재가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두 달 단기 알바인 수찬의 문제다. 수찬은 지금처럼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소풍도 일거리가 늘어 정식 직원이 필요했다. 문제는 수찬이 술만 마시면 늦거나 결근한다. 사람이 나쁘거나 막상 일할 때 성실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두 달 새 세 번을 늦거나 안 나왔다. 자느라 통화도 안 되는 게 더 문제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연재도 일이 손에 안 잡히고, 현이 쉬지도 못하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현이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연재 생각은 다르다. 한두 달은 참는다 쳐도 계속 참을 수는 없는 일이다.


드디어 전시의 마지막 날 아침, 아무 일 없이 전시를 마친다고 생각하니 천왕봉을 등반했을 때와 비슷한 자신감이 올라왔다. 25년 전, 그러니까 연재가 대학 2학년 때, 훗날 남편이 된 그와 여름 방학을 맞아 지리산에 갔었다. 등산을 좋아하던 그를 따라 동네 뒷산도 가본 적 없는 연재는 슬슬 가면 된다는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등산화도 아닌 스니커즈를 신고 갔다. 백담 계곡에서 천왕봉까지 죽기 살기로 오른 후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당시 연재로서는 미친 코스였다.      


천왕봉에서 프러포즈 반지를 내밀던 몹쓸 그를 무슨 개수작이냐고 내쳤어야 했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던 건 산에 오르느라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를 향한 것인 줄 착각에 빠져 감동의 홍수 속에 눈물 콧물을 쏟고 내려가던 길, 거의 다 왔다는 그의 감언이설에 또 속아 도착한 곳이 노고단이었다. 평생 지리산 근처도 가본 적 없던 연재기에 천왕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길다고만 생각했는데, 거긴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지리산 종주 코스임을 다음 해 첫 아이를 낳고야 알았다.      


여하튼, 그렇게 끝도 없는 길을 내려와 마침내 평지에 다다랐을 때의 감동이란. 노고단에서의 노고는 감쪽같이 잊은 채 세상에 나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 겨울 방학에 그와 결혼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편에겐 지리산 산신령의 도움이 있었고, 연재 입장에선 지리산 지박령의 저주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연재는 이 순간 왜 하필 그 생각이 났는지 싶어 부정한 무엇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소풍에 내려와 마지막 전시장을 순찰하고 3실 정돈도 마쳤다. 점심시간 이후 잠깐 손님이 몰려 정신없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정리되고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오후 5시 전시 마감이고, 그 시간 즈음해 혜진이 그림을 찾아간다고 했으니, 이후 문을 닫고 수찬에게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말할 예정이다.     

 

마감을 30분쯤 앞두고, 중년의 여자가 왔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전시실로 들어갔다. 다섯 시 전에 나오셔야 한다는 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들어간다. 연재는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그녀의 뒤를 따랐고, 그녀는 다른 그림은 쳐다도 보지 않고 ‘괜너괜’ 앞에 섰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작품에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이 혜진과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고 연재는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혜진은 시우를 두고 혼자 왔다. 베이베시터를 구했다고 했다. 연재가 마지막 손님만 가시면 작품을 가져가도 된다고 말하던 중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혜진을 응시했다. 연재가 작품을 포장하기 위해 전시실로 들어가고, 현은 카페 주문대에 서서 마감 금액을 맞추는데, 갑자기 안에서 연재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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