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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May 29. 2024

정처 없고, 속절 없는 2월 마지막 밤이 흘렀다.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연재의 비명에 현과 수찬, 혜진까지 달려왔다. ‘괜너괜’에 누군가 커피를 뿌려 놓았다. 줄줄 아래로 흐르던 커피가 액자 끝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범인은 한 사람, 그녀다. 모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연재가 작품을 들고 카페로 달려갔다. 그녀는 도도하고 우아하게 앉아 연재를 쏘아봤다. 연재는 떨리는 가슴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거 당신이 그랬습니까?”

“네, 제가 그랬습니다” 너무나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요? 왜 그러셨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와 혜진의 뺨을 사정없이 날렸다.

휘청하며 쓰러지는 혜진을 연재가 껴안으며 “당신 미쳤어?”

“너 나 누군지 알지?” 그녀는 혜진을 보며 분노의 눈알을 굴렸다.

“누구신데요?” 놀란 혜진이 벌벌 떨며 간신히 답했고 그사이 수찬이 경찰에 신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재는 현에게 혜진을 데리고 빨리 전시실로 피하라고 눈짓했고, 현이 혜진을 데리고 전시실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그녀가 혜진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연재가 움켜쥔 그녀의 손을 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사람 잘 못 보신 거 아니에요?”

“당신도 한패야?”

“아니 말로 하세요, 이러지 마시고”

연재의 읍소가 통했는지 그녀는 돌연 손가락에 힘을 빼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김. 동. 준!”

이름을 들은 혜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이틈을 타 연재가 혜진을 안전하게 뒤로 세우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러시면 영업 방햅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끝끝내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며 울부짖었다.

“저 여자가 내 남편이랑 살림을 차렸어요. 그것도 나 몰래 아이까지 낳았다고요!

나한텐 생활비 한 푼 안 보내고 저 여자한텐 비싼 그림을 사줬다잖아!!!”


적막이 흘렀다.

모두 누군가 ‘땡!’ 해주길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얼음’이 되어버렸다. 시계가 정각 5시로 바뀌고 ‘땡’ 해줄 술래, 윤희가 득달같이 뛰어 들어왔다.     


    *

수연은 윤희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는 일반인 수강생이었다. 일 년 전쯤, 윤희는 백화점에서 쇼핑하던 중 수연을 만났다. 수연도 쇼핑하러 왔다며 백화점 내 카페에서 책을 보는 남자를 가리켜, 남편이라고 했다. 수연은 남편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짜증 낸다며 서둘러 매장을 향해 갔고, 마침 윤희는 잠깐 쉬려던 참이라 카페로 들어갔다. 백화점 안 카페는 주로 여자 손님들이거나 커플이었다. 사람들의 대화하는 소리, 매장 안 음악도 시끄러운 가운데 책을 읽은 남자가 신기해 윤희는 그를 눈여겨봤다. 그런데 그 남자, 고개 들어 주변을 살피더니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한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지금 출장 중이라 못 가니 주말에 가겠다.’ 심상치 않은 대화가 들렸다. 윤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남의 부부 일에 섣불리 끼어들 수는 없었다. 한참 후, 수연이 쇼핑백을 들고 카페로 들어오자, 그는 손님이 왔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실에 오는 수연은 늘 밝고 상냥했다. 그 일이 있고 윤희가 ‘남편은 뭐 하시는 분이냐?’며 은근히 떠보았는데, 그는 사업하는 사람이라 늘 바쁘고, 잦은 해외 출장에 자주 집을 비운다고 했다.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몰라서 오히려 잘살고 있는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6개월쯤 되었을 때 갑자기 수연이 화실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수연의 남편이 집을 나갔단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싶었다.     


수연이 화실에 도구들을 챙기러 왔다. 석 달 사이 수연의 몰골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깡마르고 누렇게 뜬 수연의 얼굴에서 그동안 얼마나 부침이 심했는지 한눈에 보였다. 그런데, 전시 마감을 하루 앞두고 소풍을 찾았던 윤희는 혜진과 함께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경악했다. 그가 수연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원에서 현이 오인 신고라며 경찰을 돌려보냈다. 수찬은 한쪽 구석에 서서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하고 있다. 공구를 들고 온 해종이 현과 현수막을 철거하고 나무에 감아 놓은 LED 전선을 풀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제하가 나무 위에 올라가 전선을 푸는 현의 사다리를 장난스럽게 치워버려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창가에 선 연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이 모습을 보고 있다. 아니 눈은 이들을 응시하지만,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연재 등 뒤로 수연은 남편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도 수신 거부 상태인지 받지 않자, 윤희의 핸드폰을 빌려 전화했고, 결국 통화가 되었다. 수연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당신 꽃사슴 내가 드디어 내가 만났네! 이제 고통 분담 해야지? 그동안 나만 너무 억울했잖아, 안 그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은 수연은 언제부터였는지 혜진을 족치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혜진은 동준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이혼남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혜진이 혼자 시우를 낳는 동안 동준은 오지 않았다. 동준은 전처와 사이에 딸이 있는데, 하필 딸이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를 믿었기에, 아니 믿고 싶었기에 참았다. 그런데 시우의 출생 신고를 위해 혼인신고라도 먼저 하자고 했더니 그제야 아직 전처와 혼인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곧 정리하겠다는 그는 차일피일 시간을 미뤘고, 결국 시우는 혜진이 싱글맘으로 호적에 올렸다.     


혜진의 고백이 끝나자, 수연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흥분했다.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만났고, 자신의 가정을 깼다며 절대 이혼해 주지 않을 테니 평생 상간녀로 살라고 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건의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고, 상간녀가 된 혜진은 눈물을 흘렸다. 이 와중에 윤희는 자기가 수연에게 사실을 말해 이 사달이 났다며 혜진에게 그림값을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연재는 유리에 비친 이들을 미동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수연은 혜진의 부모를 만나야겠다며 당장 전화 걸라고 혜진을 협박했다. 혜진이 울기만 하자 수연은 혜진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켜더니, 혜진의 손을 잡고 지문으로 잠긴 액정을 풀려고 했다. 제발 그것만은 말아 달라고 울며 애원하는 혜진과 수연의 몸싸움이 과격해질 무렵 주인공이 나타났다. 이 사건의 주인공 김동준이. 그는 수연을 향해

“당신이 왜 여깄어? 당신 제정신이야? 왜 엄한 데 와서 행패야?”

“뭐? 엄한 데? 그럼 내가 어딨어야 하는데?

집구석에 처박혀 당신이 마음 돌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아니, 이젠 당신도 각오해!

내가 받은 고통의 천배 만배 더해서 당신 DNA 하나하나에 깊이 새겨 줄 테니까!”

그는 자기가 파리의 연인 박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혜진을 안아 세우며

“왜 이러고 당하고만 있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가자!”

“가긴 어딜 가?” 수연이 거칠게 남편에게서 혜진을 떼어놓았다.

이 틈을 탄 그가 수연을 붙잡으며 혜진에게 “여기서 빨리 나가! 빨리!!!”

혜진은 울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유리창에 비친 이 모습은 진짜 사랑과 전쟁이 따로 없었다. 창에 비친 모습이어선지 출연 배우 모두 메서드 연기에 빠진 재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발악하는 수연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수연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하필 테이블 모서리에 이마가 찍혀 피가 흘렀다. 놀란 윤희가 피 흘리는 수연의 이마를 냅킨으로 닦았다. 그도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그러니까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나라고?”

기가 찼는지 수연은 울음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윤희가 수연의 이마를 지혈하는 동안 그는 혜진을 데리고 나가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때였다.

  

“왜 그랬어?” 그를 향한 연재의 독기 어린 낮은 목소리에 그도 혜진도 나가려다 주춤했다.

“내가 묻잖아! 왜 그랬냐고!!!” 연재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 재차 물었다.

“이 여잔 뭐야?” 연재의 기세에 동준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연재는 그를 쏘아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연재의 눈빛은 기어이 그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그래서 행복했니?

어떻게 사람을 이십 년을 속여!

사과해! 미안하다고 사과해!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언제 들어왔는지 문 앞에 현과 해종이, 제하와 수찬이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죽어버리는 건 아니지!

사과는 하고 죽었어야지!

당신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한 거야. 알아?”

동준은 어이없는 얼굴로

“이 여자가 미쳤네! 비켜!”

연재의 눈에 이미 동준은 사라지고 그를 대신해 죽은 남편이 서 있었다.

“그럴 거면 끝까지 속였어야지!

죽음으로 커밍아웃하는 게 어딨어?

내가 그렇게 하찮았어?

속이는 대로 속아주니 쉬웠지?

어떻게 한 사람을 빈 껍데기로 이십 년을 살게 만들어!!! 그냥 이혼하자고 하지!!! 그랬으면 내가 이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을 거 아냐!!!”

부들부들 떠는 연재의 팔을 혜진이 잡았다. 연재가 혜진의 팔을 세차게 뿌리치며

“너 진짜 몰랐어? 이 남자 유부남인 거?”

혜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속은 거네 이 남자한테. 그래?”

혜진은 울기만 했다.

“그래도 좋니? 이 남자랑 그렇게 살고 싶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시우는요? 우리 시우는 아빠도 없이 어떡해요!!!” 혜진이 오열했다.

“저라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런 생각 안 했겠어요? 저도 무서웠어요!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무섭고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게 두려웠어요!

아이 키우려면 돈이 필요한데 제가 시우를 두고 무슨 일을 하겠어요

저도 일하고 싶어요! 저희 부모님도 유부남 아이 낳았다고 연을 끊었는데,

시우를 어디에 맡기고 일하냐고요. 애 딸린 엄마를 누가 불러주냐고요!!!”

혜진도 그간 가슴에 쌓아두었던 한을 폭발시켰다. 연재와 혜진이 서로를 노려보며 눈물을 흘렸고, 그가 나가려고 아무리 혜진을 끌어당겨도 혜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도 답답했는지 혜진을 끌며

“혜진아 가자! 대체 왜 저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혜진은 그를 뿌리치며

“행복하냐고요? 아뇨, 불행했어요. 날마다 불행했어요. 이 남자가 이혼을 미룰 때마다

혹시 누가 내가 상간녀인 걸 알면 어쩌나. 맨날 전전긍긍했고 이런 내가 비참해 날마다 울었어요.”

“그만해. 가자, 빨리” 거듭되는 동준의 재촉에도 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해봐요! 제가 어떻게 해야 했는지 말해보라고요! 우리 시우... 우리 시우... 아무것도 모르는 천사 같은 우리 시우 상처 없이 키우고 싶은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혜진은 시우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목이 메어 말이 끊어졌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수연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모르고 그랬지만 그래도 잘못했습니다. 나중에라도 알았을 때 시우 아빠랑 헤어지지 못한 것도 죄송합니다”

혜진을 향한 수연의 분노는 어느 정도 꺾여 있었다. 그가 다가와 혜진을 일으켰고 혜진은 그를 뿌리치며

“나한테 왜 그랬어? 도대체 왜??? 왜??? 왜???”

미친 사람처럼 ‘왜’를 외치며 절규하던 혜진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가장 극적인 장면에 ‘탁’하고 끊어져 버린 수목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탈진해 쓰러져 버린 혜진도

혜진을 흔들며 당황한 동준도

동준을 노려보며 이마에 피를 흘리는 수연도

부지불식간에 남의 잔치에 숟가락을 올려버린 연재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현이 외 3인도, 모두 음 소거된 채 크게 출렁거렸다.


거센 파도에 침몰한 마음들이 방향을 잃고 부서지는 동안, 잔인한 2월의 마지막 밤이 속절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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