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제 Oct 20. 2024

트라우마를 지니고도 평온하기

트라우마는 치료하기 힘들기 때문에 트라우마라고 불립니다. 저는 친족성폭력 생존자이기 때문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으로 평생 시달렸습니다. 주된 증상은 오빠가 나오는 악몽과 가위눌림, 트라우마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외부 자극에 의한 과호흡과 불안과 공포 반응 등이었습니다.


특히 성폭력에 관련된 뉴스를 접하면 마치 내 자신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이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저는 굉장히 힘들었고 평상시에도 과하게 각정상태 각성상태, 걱정상태로 지냈습니다. 평생 저런 악몽에 시달리며 울며 깨야 한다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PTSD 증상이 거의 없습니다. 성폭력 관련 뉴스를 봐도 가해자에게 화가 나지 무섭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도 궁금했기 때문에 차근차근 저의 치료과정을 살펴봤습니다.   

  

1. 트라우마 경험을 안전한 상태에서 안전한 상대에게 실컷 말하기     

트라우마 경험을 말하는 일은 그때를 다시 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보통 그 일이 떠오르려고만 해도 고개를 흔들며 떨쳐버리려고 하지요. 하지만 제 경험상 트라우마 경험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려면 그 경험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얘기해야 합니다.


물론 아무한테나 이야기해서는 안되고 안전한 상태에서 안전한 상대, 보통 상담사에게 말해야 하지요. 처음 말을 할 때는 무척 힘들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그 경험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말을 했을 때 더 이상 내가 그 일 때문에 떨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2. 트라우마 경험을 쓰기표현하기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 계속 쓰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큰 치유적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가해자에게 듣고 싶은 사과의 말 등을 가상으로 꾸며내어 써보는 게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글을 쓰고 안전한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습니다. 보여주면서 비평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세요.     


3. 지지체계 만들기     

트라우마는 사람에게 겪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어렵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조 모임 같은 곳에서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부터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좋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좋으니까요.     


이런 노력이 성공한다면 이제 서서히 보통의 사람과도 친해지면 좋습니다. 독서 모임이나 취미 모임에서 사람들과 접촉해보세요. 선입견이 없고 인격이 좋아 보이는 사람과 천천히 친해지고 나중에 트라우마 경험을 말해보아도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번 두번 해보면 마음에 힘이 생길 것입니다.     


4. 가해자와 대면하기     

이것은 할 수 있는 사람만 하고 못 할 것 같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치료과정을 통해 마음이 좀 단단해졌으면 자신에게 가해를 한 가해자와 대면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들은 가족이나 학교 때 동급생 등 다양할 것입니다.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대면을 하면 가해 사실을 쭉 얘기하고 사과를 하라고 말해봅시다. 그냥 얘기하기 힘들면 종이에 적어 가도 됩니다.


가해자가 나의 말대로 사과를 하면 좋지만, 다른 소리를 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너무 사과받는 것에 몰두하지 말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까요. 사과를 못 들어 좀 찜찜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거의 상처와 대면했다는 승리감이 들게 됩니다. 대면은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 해도 되고, 만나거나 목소리 듣는 게 힘들면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도 됩니다. 그 편지는 보내도 좋고 안 보내도 좋습니다.     


5. 갑자기 트라우마 기억이 올라오고 힘이 들 때     

트라우마는 갑자기 기억이 올라오고 힘이 들 때가 있어서 무서운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뉴스에서 성폭력이라는 단어만 봐도 눈물이 나고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지금은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우선 관련 뉴스 등에게서 나를 차단하고 의사선생님에게 받아놓은 비상약 안정제를 먹습니다.      


또한 갑자기 거센 감정이 휘몰아쳐서 견디기 힘들 땐 변증법적 행동치료에서 배운 방법을 씁니다. 바로 ‘냉동복근’이라는 방법이에요. 


냉 : 10도 이하 차가운 물에 손과 얼굴을 담그세요. 빠른 진정 효과가 있습니다.

동 : 에너지 해소. 짧은 시간 동안 달리기, 뛰기, 빨리 걷기 등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세요.

복 : 복식호흡. 아랫배까지 깊게 숨 쉬세요. 

근 : 근육이완. 아랫배로 들숨을 보낼 때 근육을 긴장하고 날숨을 쉬면서 긴장을 푸세요.     


이렇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이랬을 때도 계속 힘들면 가능하면 정신과나 상담센터에 급하게 가거나 마음을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안전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6. 트라우마를 짊어진 채로도 평온하기     

트라우마는 쉽게 치료되지 않아 트라우마입니다. 심리상담을 오래 해도 말끔히 없었던 일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리치료를 받고 글을 쓰고 가해 사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마음의 근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근력이 커진 마음은 트라우마를 짊어진 채로도 크게 힘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가 된 상처는 점점 희미해져 흔적으로만 남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친족 성폭력의 기억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지만 좀 더 가볍고 좀 더 덜 아프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트라우마 기억을 머릿속 깊은 곳의 서랍장에 넣어두는 상상을 했습니다. 이제 들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이런 이미지 연상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아픈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도움이 되길 빕니다. 덜 아파지길 빕니다.

이전 08화 부모와 정서적으로 독립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