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때까지만 해도 놀이기구를 잘 탔었다. 아마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렇다. 그리고 3학년때쯤, 한참 유행이던 디스코 팡팡을 타고난 후, 극도의 긴장감으로 혈압이 떨어졌었다. 걸을 수도 없이 손발이 저려오고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난 후부터는 놀이기구에 공포심이 생겨 버렸다. 그 후로는 소풍을 가도, 친구들끼리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때도 나는 항상 가방 지킴이였다. 무서운 놀이기구는 당연했고,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회전목마, 범퍼카마저도 싫었었다. 그랬던 내가 혼자 놀이공원 가기에 도전을 했다.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과제였다. 계획을 세워야 했고, 흐지부지하게 다녀오고 싶지 않았다. 우선 입장권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나처럼 놀이기구를 못 타는 사람에게 자유이용권은 사치인 것 같아 찾아보니, 야간개장 7시 입장권이 있었다. 야간 퍼레이드는 8시부터 시작이니 딱 이였다. 1시간 조금 넘게 지하철을 타고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먼저 표를 끊으러 매표소로 향했다. 점점 다 와가는데 너무 떨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민망하고 부끄럽고 당당하지 못한 기분…? '아주 잠시만 참으면 될 거야' 했지만 저-만치 떨어져 한쪽 구석에서 안절부절 한참을 서성거렸다.
'어떡하지…어떡하지'를 삼십 번은 한거 같은데... 이러다 시간만 버릴까 싶어 눈을 질끈 감고(그런 기분으로) 매표소를 향했다. 예약한 내역을 보여주니, 바로 입장 표를 끊어서 줬다. 아주 어렵고 힘겹게 입장권을 끊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저녁 7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장마가 시작한 날이어서 비가 하루 종일 오고 있었고, 더군다나 월요일이라 사람이 없어 좋았다. 한쪽 구석에 동굴같이 생긴 보관함 구역에 가방을 넣어두고 나오는 길에 비치되어 있던 놀이공원 지도를 가지고 나왔다. 지도에는 놀이기구의 위치뿐 아니라, 무서움의 강도와 설명이 쓰여있어서 아주 유용했다.
이제 첫 번째 목표인 회전목마를 타러 간다.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대기하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신나하는 아기들과 함께 말에 올라타니 마음만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안전벨트 확인이 끝나고 회전목마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회전목마다. 기분이 어쩐지 좋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스스로 뿌듯하기도 했다.
재밌는 감정들이 뒤섞이던 와중에 회전목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자동으로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의도치 않게 내가 나오는 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신나하는 아기들을 보다 보니 어느덧 회전목마는 끝이 났다. 한 번 더 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참기로 하고 다음 놀이기구를 물색했다.
곧 적당한 것을 발견했다. 신밧드가 모험하는 놀이기구였다. 한 줄에 4명 정도가 탈수 있고, 5줄 정도로 이루어진 보트 모양의 배를 타고 모험하는 놀이기구였다.
쭉쭉 들어오는 배에 대기해 있던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고 다 탈 수 있었다. 나도 따라 입장하는데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한 명이라 대답하니, 그 한 줄에 나 혼자만 태웠다. 조금의 외로움이 밀려왔다. 설명서에는 가족형 놀이기구라고 해서 만만하게 탔지만 혹시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간이 콩알만 해진 상태로 모험이 시작됐다. 한 3번 정도 밑으로 훅 꺼지는 구간이 있었다.(찰나였음) 급 긴장이 되었고, '이건 신밧드의 모험이 아니라 아마도 나의 모험이구나'라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보니 현란한 조명들과 함께 나의 모.. 아, 아니 신밧드의 모험도 끝이 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와 시간을 보니 7시 50분 정도가 되었고, 곧 퍼레이드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전철 타고 오는 길에 퍼레이드 명당자리를 검색해본 게 생각나, 모두들 명당이라고 꼽은 그곳, 무대 앞 벤치로 찾아갔다.
역시 그쪽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벤치보다는 바닥에 앉아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덕에 벤치 자리를 확보하고, 트인 시야에 만족하며 편안히 볼 수 있었다.퍼레이드가 시작하고 공연이 진행될수록 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바닥에 같이 앉아 손도 흔들고 악수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고, 마음속 흥을 힘겹게 억누르던 퍼레이드도 끝이 났다.
그리곤 야외로 나가보기로 했다. 밖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지도를 살펴보니 내가 탈만한 건 없었다. 내 목숨을 걸고 도전할 수는 없었다…바람도 쐴 겸, 구경도 할 겸 야외를 천천히 도는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즐거운 비명소리라고 해야 할까, 웃음이 픽픽 났다.
놀이기구는 탈 생각도 안 하고 사진만 열심히 찍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처음에는 예의상 두세 번 정도 찍어 주었으나, 점점 찍을수록 욕심이 생겨 뒤에 배경도 생각하고 찍히는 사람의 비율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누워서 찍는 거 아닌가 하는 웃기는 상상을 하면서 최대한 열심히 찍어줬다. 찍어주는 나도, 찍히는 사람들도 즐거웠다.
한참 걷다가 시계를 보니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탈 놀이기구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지도를 펼쳐 쭉 보니 실내에 있는 모노레일 열차가 눈에 띄었다. 사실 제일 만만하다고 느껴서 눈에 띄었다. 곧장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이미 끝났다고 착각할 만큼 아무도 없어 머뭇거렸으나 안내 직원에 밝은 목소리가 나를 맞아 주었다.
금방 모노레일 열차가 들어섰고 1번 대기 열에 1번으로 혼자 타게 되었다. 뭔가 내가 통으로 빌린 느낌이랄까. 열차 맨 앞에는 실제처럼 통유리로 되어있어, 내가 운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출발과 동시에 덜컹거리기 시작했고, 또 내 간은 콩알만 해졌으나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위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야에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두려웠던 마음은 곧 기분 좋게 바뀌었다. 중간쯤 되니 '한 바퀴만 더 돌았으면 좋겠다'싶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지막 놀이기구였던, 모노레일 열차도 끝이 났다.
짐을 넣어두었던 보관함으로 내려가 가방을 찾아 나와선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놀이공원을 마지막으로 구경했다.
비록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만큼 시시한 놀이기구뿐이었지만, 나로서는 평생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나만의 재미를 찾아 시간을 보냈다.
더 좋았던 건 평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지 않았던 것, 또 가지 않았던 곳들이 생각났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다면 작은, 이 공간에서 '남들의 시선'이라는 벽을 허문 느낌이 들었다.
★★★★
티켓을 끊을 때, 대기할 때, 놀이기구에 앉아 안전벨트 맬 때.
이때 특히, 세상 어색함과 공허함, 쓸쓸함 그리고 부끄러움이 몰려올 수 있으니 좀 더 당당해지세요.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너무 재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