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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AWRIKER Oct 29. 2020

이직에도 윤리가 필요한가요?

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21.

"그래서, L상무의 이직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떤데?"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최근 이직을 결정한 임원의 이야기가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사실 회사에서 임원의 이직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L상무의 이직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다.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심 그가 이직을 결정하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는 과거에 사업을 추진하며 인연을 맺은 '스타트업'으로 거취를 옮긴다고 했다.

대기업 임원으로서 누리고 있던 혜택을 '다운사이징(downsizing)' 하면서까지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그의 결정이 무척이나 '멋지다'라고 생각했다.


신입사원부터 임원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 적(籍)을 옮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그의 마지막 모습은 꽤나 당당해 보였고, 많은 이들이 그의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직한 회사가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곳'이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쟁사의 주요 인사 발령을 다룬 기사에서 퇴직한 L상무의 사진이 떡하니 나와있지 않았겠는가.

사실 그보다 더 놀라왔던 건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누구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퇴사 전까지 주변인들로부터 받았을 수많은 질문 세례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은 그의 치밀함이 엿보였다.




L상무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그의 완벽한 거짓말에 모두가 기만당했다는 비난 여론이 일어났다.


맡고 있던 조직의 주요 쟁점과 이슈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꽁무니 빼버린 그의 태도가 괘씸하다는 반응도 적잖아 보였다.

급기야 자기가 맡은 일에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충실히 수행했어야 한다는 '직업윤리'까지 거론되기에 이르렀는데...


각자 반응은 달랐지만 그에게 '배신자'라는 오명(汚名)이 씌워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영업팀 막내로 근무하던 시절, 사수의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내의 사업을 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그가 말한 퇴사의 이유였는데, 평소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그였기에 사수의 부재는 나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그와의 마지막 날 잔뜩 취해서 남자 둘이 얼싸안고는 엉엉 울며 이별(?)을 아쉬워했었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몇 주 뒤, 그는 새로운 회사의 명함을 들고서 사무실을 찾아왔고 이제는 동료에서 비즈니스 파트너로 변해버린 이해타산적 관계 속에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며 이직을 해야만 했을까?'


'채용'이라는 과정이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그렇게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이직 준비 역시 꽤 오랫동안 은밀히 진행됐을 터였다.

이런 속마음을 숨긴 채 두 얼굴로 회사생활에 임했을 그들에게서 '속았다'라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사정'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역량은 제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으면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상사와 회사에 대한 불만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얻고 싶었던 매력적인 조건이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지긋지긋한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지도 역시,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들은 이미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자신을 보호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이 모두를 속이는 방법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회사가 직원의 평생 고용을 보장할 책임이 없듯, 직원 또한 회사에 평생을 목매달아야 할 의무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이 모두를 '속였다'라는 사실보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더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택한 '이직의 이유'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동일선상에서 절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자리 박차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는...

'잠재적 이직자(移職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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