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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AWRIKER Oct 27. 2020

L차장의 조언

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6.

"자, 내 말 잘 들어보라고.

회사는 직원들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월급을 주고 일을 마구 부려먹는 곳이야. 그러니 회사에 충성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이 안에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고 대신 다른 살 방도를 빨리 찾아보라고!"


마치 대단한 묘수를 알려주기라도 할 것처럼 지나가는 나를 급히 불러서는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 L차장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 적당히 눈치껏 대충 하라는 말씀이시죠?"




송대리로 불리던 시절의 나는 꽤나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던 직원이었다.

항상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경험적인 면에서야 직장 상사보다 여러모로 부족했겠지만 매사 배움의 자세로 도전의 가치를 믿으며 열심히 일했다.

주변 동료로부터의 칭찬은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게 쌓인 좋은 평판은 나의 큰 자부심이었다.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회사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었고,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랬던 나였기에 L차장이 조언이랍시고 건넨 이야기는 그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우리는 꽤나 가까운 사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이후로 L차장과는 데면데면하다가 결국 멀어졌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내가 그때 L차장의 위치가 되어보니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매월, 약속한 날이 되면 통장 계좌로 '월급'이란 이름의 달콤함이 입금된다.

한 달 동안의 고됨도 까맣게 잊게 만드는 그 행복감 앞에서 나는 또다시 다음 달 '사축(社畜, 회사의 가축)'으로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런 시스템에 익숙해지면 점점 고민이 필요 없어진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그냥 묵묵히 견뎌 내다 보면 또다시 월급날은 다가올 테니...

그렇게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무력한 노동의 인과관계를 학습한다.




얼마 전, L차장의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는 여전히 차장이었고, 여전히 그때와 같은 팀에서 같은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한 간에 팀장 자리도 고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마도 가늘고 길게 버티고 싶었겠지...

하루라도 빨리 회사 말고 다른 살 방도를 찾으라던 그의 말이 무색해진다.




그래, 우리 모두는 어쩌면...

한 번 중독되면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월급 중독자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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