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떠보니 컴퓨터 강사가 되었습니다
2019년 하반기 나는 경기도의 작은 장애인협회에서 일했다. 국가사업 관련 계약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사업이 종료되는 6개월 이후 나는 다시 백수가 된다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원을 했고, 행복하게 일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20명의 장애인들에게 일거리를 설명하고, 일주일에 한 번 문서를 취합하고, 만약 문서를 보내지 않으면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지금 빨리 보내주셔야 합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해주고, 고치면 확인하고, 사업담당자에게 한 달에 한번 결과를 보고하는 뭐 그런 일이었다. 길게 풀어써도 몇 줄 안에 끝나는 단순한 일. 그래서 나는 그 일이 좋았다. 가마니처럼 앉아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아주 딱이었다.
입사한 지 1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 날, 과장님은 내게 그분들 앞에서 업무설명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설명회라고 하니 거창하지만, 자그마한 컴퓨터실에서 30분 정도 설명만 해주면 된다고 했고 물론 그런 일이기는 했다.
"네? 제가요?"
"네, 하셔야 돼요. 할 수 있으실 거예요."
해야 한다. 해내야만 한다라는 슬로건은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하셔야 한다는 그 한마디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설명을 위한 PPT를 만들었다. 대충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30페이지 정도 되는 슬라이드를 탁탁 넘기면서 설명회 시연까지 했다. 뭐야,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다음날이 되었다. 10시. 하나둘 사람들이 모였고, 비좁은 강의실에 사람이 꽉 찬 모습을 보고 멀미를 할 뻔했지만, 그분들의 눈동자에서 나는 열정과 설렘을 읽었다. 그분들과 함께 할 반년이 기대됐다. 더 잘 해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파워포인트를 한 장 한 장 열심히 넘겨가며 열심히 발표를 했다. 발표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내 핸드폰에는 그 기능이 없는데요."
"선생님,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출석체크는 꼭 집에서 해야 하는 겁니까?"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질문의 파도에 나는 허우적허우적 댔다. 그럼에도 시간은 갔고, 사업설명회는 끝났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무탈하게 끝이 난 6개월의 사업, 사업은 곧장 연장되지 않았고 나의 거취는 불분명해졌다. 12월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처장님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ㅇㅇ시 지회에서 컴퓨터 강사가 필요한데 나보고 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스카우트 제안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땜빵이 되어보라는 말이었다.
마침 협회에서 제시한 강사 기준에 맞는 자격증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강사>라는 직군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내게 강의를 듣는 분들은 무슨 죄인가. 어버버 하다가 끝나버릴 강의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거절하자, 이건 진짜 못한다고 하자.
"예? 제가요? 저 진짜 못하는데?"
"그래, 너는 잘할 거다."
"네? 아니 저 못할 거 같은데.."
그래 하면 하겠지만, 잘할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거절을 제대로 할까 생각하던 그때, 처장님은 뜨거운 옥수수차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번에 설명회 때 네가 만든 피피티를 봤어. 잘하더구먼. 그 정도면 충분하다니까."
아뿔싸.
그냥 대충 만든 피피티가 내 발목을 잡으려고 하다니. 그러니까, 쓸데없이 너무 열심히 했다. 아이고아이고. 맘속으로 곡소리를 내며 어떻게 하면 우아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일단 퇴근하기 전 말씀드린다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새로운 기회네요~!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어차피 한 달이잖아."
나의 얇은 귀는 남편의 조언을 그대로 흡수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그래, 내가 언제 강사를 해보겠어. 한번 해볼까? 하는 거창한 호기심으로 변모했다. 이 죽일 놈의 호기심.
처장님에게는 생각할 시간 하루만 달라고 했다. 해보고는 싶은데 이제는 거리가 문제였다. 신혼집에서 그곳까지는 1시간 30분은 족히 걸렸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야만 가능했다. 세계 체력 최하위권을 담당하는 내가 버스를 타고 달려서 마이크를 잡고 강의를 할 수 있을까? 후들후들 떨리는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두 발이 아닐까? 내가 제대로 서 있을 수나 있을까? 고민의 고민의 연속을 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출근길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볼때기를 스쳤다. 상쾌했다. 패딩으로 꽁꽁 싸맨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커브를 돌 때, 버스 안으로 거대한 빛이 들어왔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질끈 감은 눈에 미간을 찌푸릴 때 햇빛이 내게 강렬하게 빔을 쏴주며 말하는 느낌, 아니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해, 해. 그냥 해. 해해해해해 해. 제발 해."
버스에 내리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 우유 한잔을 비장하게 마시고는 회사문을 열자마자 처장님에게 말했다.
"처장님, 저 해보겠습니다."
"그래, 잘할 거야."
처장님은 곧장 ㅇㅇ지회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강사를 구했다고 큰소리로 말하셨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눈을 질끈 감으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컴퓨터 강사가 되었다. 남편을 제외한 가족에게는 차마 이 사실을 전하지 못했다. <나 강사가 되었어!>라고 말하면 <네가?><네가 왜?><마이크 잡고 우는 거 아니야?>라는 친가족들의 친애 어린 반응을 듣기 싫어서기도 하고,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1주일이나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지독하게 소심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혐 하는 인간이었으므로. 아,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업무 실험일지
일반사무업무에서 컴퓨터 강사로 방향을 틀어보다. 불안하지만 설렘이 공존하는 상태. 잘 해낼 수 있을까?
(2019.12.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