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일
그러니까 강의를 한 지 10일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회장님은 전임강사를 해보라며 부추겼다. 계약직도 아닌 무려 정규직이었다. 1월의 절반이 지나는 동안 나는 펑크 한 번 없이, 사건 사고 없이 수업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제대로 된 강사는 아니라고, 나는 이제 2월부터는 새직장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아, 제가요.. 음. 솔직히 장기적으로는 너무 힘들 거 같아요." 회장님은 의아해하며 "그럼 2월부터는 뭐하려고? 할 게 있는가?"라고 물었고, 나는 티 없이 맑고 자신 있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대답해버렸다. 그게 나의 계획이었다. 무계획으로 무장한 막무가내를 보여드리면 먹힐 줄 알았는데 회장님은 끄떡없었다. 아직 시간이 1.5주 정도 남았으니 다음 주까지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 하루 수업을 진행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생각, 계획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장님 앞에서는 절대 못하겠다고 말해놓고,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는 <어쩌면 이게 기회일 텐데, 아예 제대로 핸들을 꺾어 봐?>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고민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일은 지금껏 일을 해오면서 가장 짧았지만 가장 강렬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다이렉트로 알게 해 준 일, 하지만 오히려 내가 얻는 게 더 많은 일.
내가 수강생들에게 전달한 것은, 엑셀 셀 나누기, 셀 합치기, SUM함수, 한글로 신년카드 만드는 방법 등에 관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받고 배웠다. 오후 2시, 가장 힘든 수업이었던 한글 수업을 진행할 때였다. 설명을 마치고, 이제 개별 실습을 시작할 차례.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조용했던 강의실에 수군수군 말소리가 하나둘 겹쳐지기 시작했다. 벌떡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오른팔이 불편하신 남자분이 강의실 중앙에 서 계시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빨리 상황을 수습할 생각뿐이었다.
"아, 아니 제가 자리를 바꾸어야 할 거 같아서요. 이분이 컴퓨터를 잘 못 다루시는 거 같아서..."
나는 모르는 것을 너무 본인에게 물어봐서 귀찮으니 자리를 바꾸겠다는 말인 줄 알았고, 정말 그런 건 줄로만 알았지만, 남자분은 그분을 도와드리기 위해 옆자리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고, 옮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음이 발생한 것일 뿐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 일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협한 생각들을 조금씩 깨트려주었다. 그러면서 배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평소 내가 하는 생각들은 참으로 편협했구나."안녕히 계세요"대신에 "늘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도 하나둘 본인의 반찬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내게는 시시한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벅찬 배움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6년 동안의 사회생활 중에서 이 일은 처음으로 일의 기쁨과 뿌듯함을 확실하게 알게 해 준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내내 혼자 4과목 이상의 수업을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아마추어인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몇 달 전, 어묵꼬치가 너무 먹고 싶어 편의점에 냅다 들어간 적이 있다. 어묵은 퉁퉁 불어 딱 보아도 더럽게 맛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국물이라도 먹고 싶었기에 주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사장님은 맛대가리 없는 어묵을 사 먹겠다는 손님에게 손사래를 치며, 아무리 먹고 싶어도 이건 먹지 말라고, 안 그래도 너무 오래 되서 폐기하려했다고, 팔지 않겠다며 나를 말렸다. 사장님은 과연 프로였다. 맛이 부족한 식품은 팔지 않겠다는 소명과 가치관이 없었다면 옳다구나! 하고 모조리 어묵을 팔아 치웠을 텐데, 뜨거운 양심에 감격스럽기까지했다.
참 뜬금없지만 나는 편의점 사장님의 어묵 이론 덕분에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수강생 분들이 강의력이 부족한 내게 무한한 칭찬을 해주신 것은 정말 오랜만에 <젊은 강사>가 왔다는 사실이 가장 컸을 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언제 들통날 지 모르는 얕은 지식을 가진, 그러니까 아주 알차고 탱탱한 어묵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고, 회장님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했다. 배움의 열정이 뜨거운 분들에게 나는 영양가 없는 어묵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정말 계획대로 한 달 만에 마무리된 수업, 마지막 날. 수강생 중 어머님 한분이 나를 굴국밥집으로 데리고 갔다. 굴국밥에, 굴전도 먹으라고, 한 달 동안 몸이 고단했는데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굴국밥을 삼켰다.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생일도 아닌데 나는 양말 3족 세트, 쪽지, 자일리톨껌, 인절미 과자, 토마토, 빵을 받았다.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 날은 1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자연인의 몸이 된 것이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해보지? 아니, 일단 오늘은 좀 쉬자. 하면서 부렸던 여유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