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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간호사 Sophia May 20. 2024

한국 병원 근무 경험기 - 4-1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Covid-19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세균과 바이러스가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인류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이 있다면 그건 코로나라는 녀석일 것이다. 이전에도 신종플루니, 메르스니 다른 이름의 빌런들이 활약했지만 코로나19(우리나라에서 채택한 정식명칭)가 단연 1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인이라면 임상에 몸담은 이상 피할 수 없는 만남이겠지만 기존의 다른 질병들처럼 걸리면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아주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이민을 가기 위해 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었다면-한국에서만 일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면- 아마도 코로나를 맞서는 업무를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실제로 접한 코로나는 위험하고 무서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이가 엄청나게 많이 생기면서 독성은 약해지고 전파력만 커진 만만한(?) 바이러스가 되었지만, 내가 코로나 전담병원에 전투자세로 뛰어 들어갈 시기만 해도 ‘코로나 양성 = 사망’이라는 공식이 통하던 때였다. 열만 나고, 기침만 해도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물가르듯 멀어졌으며 나라에서조차 양성환자는 격리를 시키며 쉬는 날을 강제로 정하고 업무에서 배제하기까지 했던 전무후무한 감염병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정말 이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냐 하면 또 그뿐만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 환자가 전국에서 백 명 이상 확진되기 시작한 초창기인 데다 해외에서 입국한 내외국인들이 주로 감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동선이라든지 격리의 의미가 있다고 느껴질 때였고 보호장비만 잘 착용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으며 앞으로는 의료인으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할 거라는 마음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지역의 코로나전담기관으로 지정된 의료기관에 정규직 간호사로 입사하여 겨울 내내 팥죽 같은 땀을 흘려가며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의료인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첫 출근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호장비를 순서대로 착용하고 순서대로 벗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바람하나 통하지 않는 천막 같은 옷을 입고, 덧신을 신고, N95마스크를 착용하고, 고글을 끼고, 장갑을 두 겹으로 무장하면서 그 추운 겨울에 입는 것만으로 등에 땀이 줄줄 흐르는 경험을 했다. 보호구는 입는 순서보다 벗는 순서가 더 중요했다. 오염된 보호구를 잘 벗어야지만 주변을 오염시키지 않고 나도 보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입고 벗는 것을 식은 죽 먹듯 물 흐르듯 쉽게 해내야지만 다급한 상황에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인력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정확하게 실행하는 것이 곧 생명과 연관되는 것이기에 모두가 곤두선 신경을 억누르며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다.


이전에는 병동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없었기에, 비록 경력자였지만 병원에서는 감사하게도 신규처럼 한 달 동안 프리셉터를 붙여주었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내가 독립해서 일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배려를 해주었다. 그 덕에 지금은 병동간호사의 업무를 할 줄 알고, 자신감도 생기게 되어 좋은 경력을 만들었다 생각한다. 다만, 그 시국의 간호사의 업무는 정말 살인적인 강도였다. 8시간 근무 동안 최소 2시간에서 4시간까지도 음압이 걸린 구역에 들어가서 아픈 환자들을 살피고 수액처치, 채혈, 투약, 기저귀 교체 등등 최대한 많은 일을 단시간에 마치고 나오려고 노력하며 일했다. 다들 땀으로 샤워를 하고 나오기 때문에 아무리 쉬고 와도 편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없었고 입원 때부터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은 언제라도 중환자실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을 넘겨도 격리구역에서 나오지 못하고 더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는 때도 많았다.


격리라는 것이 환자들에게도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이었을까, 나는 건강하고 아프지

않으니 일하러 들어왔다가 나가서 집에서 쉴 수라도 있는데 아픈 이들은 집도 아닌 곳에서 때로는 사경을 헤매며, 언제 나을지도 모르는 병에게 휘둘리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랬기에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라도 환자를 위해 더 해주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노력을 했었다.


특히, 우리 지역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집단감염이 터지면서 치매환자들이 대거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와상환자로 거동이 불가능하고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스스로 안 되는 분들이라 24시간 기저귀를 착용하고 계셨으며, 몸을 가누기 힘든 분들이기에 2시간마다 체위변경을 해주어야 욕창발생을 막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로 병동이 차게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병실에 간병인 등 인력이 항상 있어야만 간호가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환자분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간호사와 조무사가 끊임없이 손을 바꿔 들어가서 챙겨야만 했다. 치매환자들은 특히 밤시간에 섬망이라는 증상을 많이 겪게 되는 데, 이 때는 말로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래서 더욱 환자를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에 옆에서 계속 지켜보며 증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또 고령의 어르신들은 자칫 약물만으로 증상을 다스리다간 다른 부작용 등이 생길 수 있어서 그저 밤동안 무장한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있어주는 것이 우리의 업무의 많은 부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에 시작한 일은 한여름이 될 때까지도 줄어들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확진을 받고, 그만큼 세상을 떠났으며, 사람들은 코로나를 세상의 종말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나에게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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