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나 반려동물, 또는 내 삶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정든 고향이나 집, 그리고 아끼며 수집했던 물건 등과 헤어져야 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느낌들이 만들어 내는 감정은 또한 무엇일까요?
슬픔이란 바로 이런 이별과 상실의 순간들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바로 그 느낌과 감정입니다.
이별, 개개인에게 익숙했고 스스로 좋아했던 무엇인가와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자신의 의지나 결정과 상관없이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그런 경우에는 훨씬 더 크고 깊은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전쟁, 병 그리고/또는 인생의 여러 실패들로 인해 다가오는 헤어짐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느낌의 형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내 안의 감정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 처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며, 이런 이해는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당사자들의 심리적 상황과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중요한 핵심 요인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감정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곡가 카탈리니는 오페라 <라 왈리>에서 주인공 왈리 역을 맡은 소프라노의 서정적인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가슴으로 그 감정들을 확인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FOrHrseEt4
이 아리아 “이제 멀리 떠나가리 Ebben! Ne Andro lontana!”는 주인공 왈리에게 아버지가 자신이 정해준 사람이 아니라 왈리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면 부녀지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하자, 거기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이 그제까지 자신이 애정 했던 많은 것들과 이별을 고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집과 가족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는 그곳에선 또 다른 희망과 사랑이 생겨나리라는 주인공의 감정을 잔잔한 리듬 위에 애잔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이별의 순간,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스스로를 발견하신다면 이 아리아를 들으며, 그 감정의 본질을 한 번쯤 되새겨 보면 어떨까요?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서 애절한 감정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면, 과연 미술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이 가진 형태와 색이라는 특징을 통해 슬픔이란 감정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을까요?
피카소는 자신의 고국인 스페인이 내전에 휩쓸린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느끼게 되었던 많은 상실의 경험을 캔버스로 옮기고 있는데, 특히 나치 독일의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을 보고 느꼈던 전쟁의 폭력성과 인간의 잔인함을 그린 <게르니카>가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완성시킨 1937년,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죽은 아이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던 여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또 한 편의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자신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초현실주의 예술가 도나 마르를 모델로 삼아 그렸던 <Weeping Woman – 울고 있는 여인>입니다.
Oil on Canvas, 60.8 × 50 (cm) 영국 테이트 갤러리 소장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쳐온 시점, 즉 상실의 순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곤 합니다. 머릿속이 멍한 채 생각이 멈춰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고 나면, 발생한 일에서 촉발된 느낌이나 감정이 왠지 나에게 닥친 것이 아닌 것 같은 객관화가 시작되며, 그 시점부터 슬픔의 느낌이나 크기가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렇듯 망연자실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게 되는 바로 그 지점부터 우리의 마음속에선 많은 느낌과 감정들이 복받쳐 솟아오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에 앞서, 우리의 육체가 우선적으로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그 물방울들을 훔쳐내기 위해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가는 순간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치켜든 손에 힘이 들어간, 그렇게 손을 움켜쥐고 슬픔을 삭이고 있는 여성을 묘사한, 이 <울고 있는 여인>을 보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란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움켜쥔 손, 그 손을 목격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느낌과 감정은 상처받고 비탄에 빠진 그림 속 주인공에 동화되기 시작하는데, 피카소는 보편적이고 익숙한 이미지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와 색감으로 대상의 신체와 행위를 그려내고 있고, 이런 낯섦은 왠지 처음 그림 앞에 서는 우리들을, 그림의 주인공이 드러내는 감정에서 한발 떨어져,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끔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그림 속의 주인공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 스스로 슬픔을 느끼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인식시키는 쉼표 같은 작용을 하는 것 같고, 이런 아주 짧은 감정의 휴지기가 지나고 다시 그림을 보며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인이 느끼는 슬픔이란 감정에 다가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을 하신 많은 분들은 아마도 자신의 시간을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순 없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갖은 기억들이 있을 텐데요,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미국의 시인 루이스 글룩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자신의 시 <<A Fantasy>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미망인이 장례식의 순간에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과 소망을 묘사해 내면서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을 채 느끼지도 못한 채, 장례식장에서 묘지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조문을 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미망인이 점차 자신을 엄습하는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며 그 슬픔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홀로 남은 이 시간을 사랑하던 사람이 아직도 병원 침대 누워있던 그 시간으로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 것이었는데, 시인은 그 지점을 아주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는 하지만 담백한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곗바늘을 반대방향으로 조금만 되돌리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애잔한 감정.
19세기의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인 이반 크람스코이는 이런 순간이 닥쳤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올라와서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느낌과 감정을 아래의 그림 속에 표현해 내고 있는데
<위로할 수 없는 슬픔>
죽은 이의 시신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옆에 짙은 색의 상복을 입은 미망인이 넋을 잃은 채 홀로 서있습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하지만 아무것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실내의 장식들마저도 흐리고 희미하게 표현되어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주인공의 감정상태를 배경에서 더 강조하고 있네요
이 순간 미망인의 마음속에선 아마도 루이스 글룩의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벽시계로 달려가 시곗바늘을 사랑하는 이가 아직도 그녀의 곁에 있을 그 당시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뿐일 것 같습니다.
이렇듯 뛰어난 예술 작품에서는 슬픔의 원인이 되는 상실감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묘사한다기보다, 슬픔을 야기하고 있는 주변 상황과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반응을 묘사해 냄으로서 감정의 본질을 우리 스스로 더 깊숙이 이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피카소가 <울고 있는 여인>에서 슬픔의 증거로 포착해 낸 울음은 슬픔을 암시하는 핵심 요소로 사용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 울음을 통해 슬픔을 극복해 내기도 합니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슬픔을 향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감상을 통해 우리 안에 쌓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