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태평한 시기임에도 가끔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무엇인가 부정적인 일이 닥칠 것 같은 불길함에 휩싸이고 합니다.
이렇듯 음울함, 불길함은 개개인을 짓누르는 내면의 문제들이 만들어 내는 혼란스러움과 모호함 등에서 기인하곤 하는데 프란츠 클라인의 <치프>는 이런 느낌을 독특한 흑백의 추상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Franz Kline <Chief> 1950. Oil on canvas, 58 3/8" x 6' 1 1/2" (148.3 x 186.7 cm)
캔버스를 찢고 그림을 보고 있는 관람객을 향해 튀어나올 듯한 검은색의 추상적인 형체, 여러분은 이 형상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있나요? 저에겐 저 알지 못할 물체가 우리 앞에 펼쳐질 가까운 미래에 뭔가 불길한 일을 전개할 것만 같은 암시처럼 보입니다.
프란츠 클라인은 아내가 정신질환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었기에, 종종 아내가 평온을 찾고 집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 정리된 상황의 모습들을 그리곤 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클라인은 자신이 그리는 추상적인 형체들이 갖는 의미가 아내의 병과 연관되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비평가들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의 내면을 짓누르게 되었고 그의 흑백 추상에서는 이런 불확실한 삶에 기인하는 불안함과 그를 둘러싼 삶의 문제들이 일으키는 작가 내면의 혼란과 모호함으로 인한 불길함이 형상화되어있다고 평가합니다.
엉성하고 거친 큰 붓놀림은 질서를 추구했던 몬드리안의 반듯한 선과 비교하면 아주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동시에 마치 고흐나 이중섭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억눌린 자아를 극복하려는 투지와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삶의 불안함이 유발하는 내면의 혼란은 어느 누구에게도 평온함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며, 그런 심정에 처한 예술가라면 강하고 거친 힘에 좌지우지되는 세련됨과 리듬감이 부족한 원시적인 형태의 이미지들을 창조해 내곤 합니다.
힘이 넘치는 붓터치는 오히려 주체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Untitled (Black on Gray), 1967~1970, Acrylic on canvas, 203.3 x 175.5 cm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멀티폼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커다란 사각형으로 캔버스의 영역을 나눈 듯한 위 그림 속 이미지는 현대 미술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마크 로스코를 쉽게 떠오르게 할 만큼 그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1970년 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크 로스코는 그가 죽기 직전인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까지 작업한 작품 속에 자신의 감정 상태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었습니다.
그레이와 검은색의 그림들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로스코는 그 색들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화면을 수평으로 분할한 구도속에서 아무런 빛(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하늘 아래 살아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는 버려진 잿빛 대지가 펼쳐진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 로스크의 그림이 보여주는 감정이 뻑뻑하게 칠해진 캔버스를 뚫고 나와 암흑으로 덮인 그의 마음 저 깊숙한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은 불길함이라면 로스코와 동시대를 살던 오스트리아 음악가 리게티의 음악 역시 다양한 음들의 중첩을 통해 구성해낸 밀도 높은 소리를 통해 우리의 신경을 불안하게 자극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음악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암흑으로 뒤덮인 우주의 불길함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는데, 직접 한번 들어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jUaPwTL5vL8
1961년 작곡된 <Atmosphères-아트모스페르>인데요, 작곡가 리게티는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아주 뻑뻑하게 공간을 채워나가는 밀도 높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소리만 듣게 되면 마치 전자악기 등의 특수 효과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지 않은 불협화음이 흘러나오는데, 3분 14초경 현의 미세한 트레몰로로 시작돼서 점차 관의 소리가 비중을 높여 나가다가 3분 40초경 피콜로들이 아주 높은 고음을 내면서 목관들이 합주를 하는 장면이 지나면 갑자기 오케스트라 악기 중에서 가장 저음을 내는 콘트라 베이스가 순간적으로 가장 높은음에서 가장 낮은음으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현이 만들어 내는 두께감, 한 없이 가벼운 목관의 소리들이 쌓아 나가는 소리의 깊이와 밀도감, 그리고 찾아오는 거대한 변화
이렇듯 안정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지속적인 흐름이 소리로 치환되는 순간 묘한 불길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불길함이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문제들이 일으키는 혼란스러움과 모호함 때문이라는 처음에 제시했던 결론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드가 앨런 포는 불길함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나 까마귀 등을 자신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시키며 문학계에서 불길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가로 유명하죠. 앨런 포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런 감정들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이 되어 주곤 했는데, 고갱 역시 그중의 한 명입니다. 고갱은 포의 시 <더 레이븐>에서 영감을 받은 감정을 아래 보이는 작품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데요
NeverMore, 1897, oil on Canvas, 96*130 cm,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타히티 여성의 시선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고민에 빠진 근심 어린 표정을 읽게 됩니다. 왠지 정면을 향하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의 등 뒤를 확인하고 있는 그녀의 불안한 표정 너머로, <더 레이븐>에 등장하는 시구인 Nevermore가 보이고 그 옆의 창가엔 시의 제목이자 불길함의 트레이드 마크인 까마귀가 앉아 있습니다.